최종병기 활

 

 

어제 저녁에 친구와 함께 ‘최종병기 활’을 봤습니다. 병자호란(163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스토리 자체와 극의 구성이 박진감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올 여름 국내 영화 중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시 청에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이 50만명이라는 자막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계속 드는 생각이 정말 이게 사실일까?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이 포로로 잡혀갈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나는 지금껏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하여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주화파 최명길의 기록에는 50만명, 19세기 실학자 정약용의 기록에는 6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아예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라는 단행본도 출판되었더라구요.

 

당시 조선 인구가 1천만명이였던 것을 따지면, 엄청난 인원(전체 인원의 5퍼센트)이 청의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이고,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그 포로들은 주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나갔고, 명과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대규모 건설 사업에 부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후 포로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부녀자들을 ‘화냥년’이라고 하면서 조선에 남은 자들은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수백 명을 단위로 한 조선 포로들은 철군하는 청군의 부대와 부대 사이에 끼인 채 끌려갔다. 뒤에서는 청군 한두 명이 무기를 들고 따라갔다. 청군이 무서워 포로들은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p73 중에서

 

조선 포로들은 인맥이 좋으면 사속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공속은 속환되어도 공천인이 되므로 이를 피했다. 그래서 인조 15년의 첫 속환사는 1천 명 남짓한 포로들을 속환할 수 있었고, 이해 11월의 사은사 최명길은 780명의 포로를 속환했을 뿐이다. ...가난한 농촌 백성이나 조선에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는 수십만의 사람들은 청나라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었다.-p145 중에서 - 알라딘

 

위 인용문은 위 책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당시 포로된 자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돈이 없어 풀려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화에 보면, 이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마지막 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산천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뭐가 잘못된 것인가?

 

이 역사적 사실이 375년 전에 이 땅에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강력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상황입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722년경 앗수르에 멸망하였고, 남왕국 유다는 586년경에 바벨론에 멸망하여 4,600명이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합니다. 나라를 읽은 백성이 포승줄에 묶여 이억 만리(대략 1,500 Km), 사막을 지나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들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목 놓아 우는 모습이 시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그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아리가 조선 백성들의 메아리와 오버랩되면서, 많은 여운을 남겼습니다.(그래서 글을 적는 것입니다.)

 

이렇게 병자호란과 바벨론 침입은 유사성이 강합니다. 먼저, 조정의 무능이 유사합니다. 조정이 무능하니 백성들이 개고생합니다. 그런데, 어쩐단 말입니까? 이게 역사적 사실이고, 역사적 반복인 것을...(그래서 우리는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하고, 국회의원들을 잘 뽑아야 합니다. 이승만 정권 때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국민들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국민들에게는 국군이 승리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방송하였던 사실을 아십니까? 병자호란 때 인조가 도망가는 모습과 너무 비슷하지 않는가요? 이렇게 역사는 반복됩니다.)

 

그런데,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조정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지만, 조선 백성은 아무 이유도 모르고 끌려갑니다. 힘없는 나라 백성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규모에서 바벨론 포로는 5천명이 채 안되지만, 조선 포로는 무려 50만명이나 됩니다. 당시 조선의 피폐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다음에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상황이 다릅니다. 조선 백성은 속전을 내거나 도망을 치거나 청과의 협상에서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소규모의 인원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속전을 치르지도 않고, 도망을 치지도 않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은 고레스 왕의 칙령을 통하여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 무조건적인 은혜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사야서 등 선지서에 보면, 주께서 직접 백성들을 이끌고 시온으로 돌아올 것인데, 주의 사자가 사막길, 광야길을 예비하라고 합니다.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합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속전을 치르지도 못하는 조선 백성처럼, 우리가 죄의 빚에서 속전을 치르지 못하고, 아니 오직 죽음으로만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당신이 직접 죽음으로 죄의 값을 치르고 백성들을 속전하셨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바벨론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최근 어떤 미친 목사가 내년 총선, 대선을 맞이하여 기독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둥, 아이 5명을 낳지 않으면 처벌해야 된다는 둥 술에 취한 소리를 한답니다.(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인데...) 그런 소리에 괴로워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과연 어떤 응답을 하실까요? 악인들이 졸지에 망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적의 잔인함과 조정과 백성의 무능함. 그리고 구원의 능력 등은 본 영화와 이스라엘의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영화에서 구원의 능력은 한 개인(박해일)의 귀신같은 활솜씨이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구원의 능력도 한 개인(메시야 예수)의 역설적인 고난 받는 능력입니다.

 

본 영화의 결말은 자기 동생(문채원)을 구하고 자신(박해일)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내뱉는 대사가 “한양집에 가자”였고, 그 죽어가는 오빠를 바라보며 동생이 내뱉는 대사가 “다시 돌아가야 할 우리 땅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오빠를 누인 채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본 글의 결말도 땅입니다. 비록 이 땅이 바벨론에 사로잡힌 땅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땅, 본향을 사모하며 살자.... 아니면, 그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겠지요.(결말이 너무 교훈적인가요? ㅋㅋ)

 

아무튼, 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