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30~37 동상이몽(同床異夢) 2019. 6. 9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 이몽(異夢)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중에 독립운동을 한 내용입니다. 픽션도 있지만 실제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과 활동들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이몽인지 짐작을 해 보건데 대한독립이라는 뜻은 같은데 그 방법론에서 다르기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봅니다. 정치와 외교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법론 때문에 여러 단체들이 생깁니다. 대한독립이라는 뜻은 같지만 그 방법론이 달라 다른 단체가 생기고 그 단체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말합니다.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많은 교파와 교단이 생겼느냐고 묻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정도는 어느 정도 세계사를 통해서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라고 하면서 수많은 교파와 교단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합동이나 합신이나 통합이나 고신에서 이단시 된 사람들도 영입을 합니다. 합동 측 교단과 여러 교단은 탈퇴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기총 안에 교단들의 이름을 보니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이라는 비슷한 이름의 교단이 10개도 넘게 있습니다. 모두가 총회가 있고 신학교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분리된 것입니까?

 

독립운동 단체처럼 대한독립에 대한 뜻은 같지만 그 방법론이 달라서 다른 단체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교단의 분열을 보면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는 큰 이슈가 WCC 와 같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합동 안에서는 분리가 안 일어났습니까? 통합 안에서는 안 일어납니까? 또 분리가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뜻이 같은데 방법의 문제로 분리가 일어난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교권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 다툼들로 인하여 분리되었다고 봅니다. 말이야 다 자기들이 진리를 따른다고 하겠지만 이권과 명예욕에 점철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한 교회를 다니고 있어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인 것입니다.

 

본문 30~3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곳이란 가까운 문맥을 보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한 곳에서 떠나시는 것입니다. 어디로 떠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지 않고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수 없기에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시면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그 가는 길을 알리지 않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어떤 메시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메시아인지 알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앞에서 한번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베드로가 말리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책망을 들었기에 두 번째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렇게 말리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죽으신다는 단어는 알겠는데 메시아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두려움 때문에 묻지도 못합니다. 구약에서 분명히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모릅니다.

 

시편 22:1절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다윗의 시편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대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렇게 예언한 것입니다(벧전1:11). 이뿐 아니라 십자가 밑에서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흔들면서 조롱하는 내용과 손과 발에 창이 찔리실 것과 겉옷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질 것과 속옷은 제비 뽑아 가져 갈 것을 다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죽는 메시아를 믿지 않습니다.

 

이사야 53:1~12절입니다. “1 우리가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3)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너무나 분명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이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눈이 가려지고 그 귀가 막혀있다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가 되고 있기에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메시아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또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여전히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메시아니즘과 세대주의자들이 힘을 합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그런 내용들을 홍보하면서 공포를 조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후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제자들도 모릅니다.

 

다니엘 7:24~27절입니다. “24 그 열 뿔은 그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로마 시대에 한 왕이 일어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바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입니다. 이 날은 마흔 두 달 이라고도 하고 삼년 반이라고도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창조는 7로 완성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한 때 두 때 반 때로 봅니다.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족보가 나오는데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14, 포로에서 예수님까지 14대를 말합니다. 합하면 42가 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곧 삼년반이 달수로 하면 마흔 두 달 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상의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구약이 삼년 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약이 완성이 되며 신약도 십자가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도 삼년 반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완성과 신약의 완성도 십자가로 될 것을 넘겨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넘겨져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넘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스스로 잡히시고 넘겨지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성경 세 곳을 찾아보았습니다만 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우리나 간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본문 33~3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이르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그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면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에게 넘겨져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말씀을 하셨고 그 일을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서로 높으냐고 다툰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기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갑니다. 참으로 동상이몽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모인 것입니까? 죽기 위하여 낮아지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아니면 살기 위하여 높아지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늘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35~3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고 앉으십니다. 이 모습은 랍비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를 모세의 자리라고 합니다(23: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는 것을 예수님은 아주 심하게 책망을 합니다. 모세가 증거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르친다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높임을 받으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자리에 가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기에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다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귀어도 어떤 사람과 사귀려고 합니까? 어려서 우리의 부모들이 누구와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까? 동네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까? 부잣집 아이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나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를 내 쫓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어린 아이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혈육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죄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력하게 죽어가는 십자가로 이루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지셔서 섬기시는 자리가 그의 고난과 죽음과 장사되심입니다. 그 낮아지심으로 죄와 사망 안에 갇힌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부활로 함께 일으켜서 하늘에 앉히시는 일이 그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일에 부름을 받은 자는 높아지려고 주님을 따르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합니다. 결코 세상의 높아짐이나 영광을 받는 길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다 도망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망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니 그제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전합니다.

 

빌립보서 2: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우리가 높아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