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26~31 다 나를 버리리라 2020. 2. 2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3)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4)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지난주에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주신 떡과 잔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잔이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 있었던 말씀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피 앞과 뒤로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는 내용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에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이곳에서 기도하시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만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잡히십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십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올리브가 나무가 많은 동산이기에 그곳에 기름 짜는 틀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곳에서 올리브가 으깨어져서 기름이 나오듯이 기도합니다. 이 겟세마네가 있는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나를 버리리라고 한 단어의 각주를 보면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는 것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실족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나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스가랴 13: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이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목자가 침을 당하고 양은 흩어져야 합니다. 흩어진 작은 자들 위에 함께 하십니다. 흩어지지 않는 자 위에 함께 하심이 아닙니다. 흩어지지 않을 자도 없지만 흩어진 작은 자들과 함께 합니다.

 

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다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부르시고 예루살렘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할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을 보고서는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제자들을 부르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갈릴리에서 처음 시작할 때와 십자가 이후에 다시 시작할 때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 버림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29~31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아뢰기를 다 버려도 자신은 그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들은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모두가 다 실족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려고 나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함께 갔지만 그 밤에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갑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이 재판 받는 곳 까지 멀찌감치 따라갔지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저주 맹세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나 제자들은 자신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말은 그들이 함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버리는 것을 보면 사람의 진심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다 부인해야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 지는 일에 함께 가서 죽었다면 그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구원 받을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스가랴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는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서의 이 말씀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하신 말씀이시기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다 버립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버린다는 말씀이 실족한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실족한다는 말씀을 찾아봅니다.

 

마가복음 4:16~17절입니다.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네 가지 밭이 나오는데 길가 밭, 돌밭, 가시밭, 옥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가지고 좋은 밭이 되자고 합니다. 농부가 들으면 웃을 일입니다. 밭이 스스로 좋은 밭이 되는 밭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인간은 옥토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조차 돌밭이기에 다 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6: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1)예수를 배척한지라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체로 보았기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배척하였다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나를 버린다는 말씀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버리고 실족한다는 이 단어가 스캔들이이라는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9:42~47절입니다.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1)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2)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3)(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1)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2)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3)(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1)범죄 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이 걸려 넘어진다는 말인데 42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실족시킨 자들이 많습니다. 43절에 손이 범죄 하면, 45절에 발이 범죄 하면, 47절에 눈이 범죄 하면 이라는 이 단어들도 다 나를 버리리라는 단어와 실족이라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과 발과 눈이 얼마나 우리를 실족하게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실족을 하지 않으려면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르고 뽑기는커녕 실족하는 손과 발과 눈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베드로나 제자들이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그들은 예수님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림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게 됩니다. 죽기까지 헌신 충성하겠다는 말도 못하게 됩니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갈릴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내가 결단하고 결심하여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분위기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부흥회 강사는 신과 거래하도록 분위기를 만듭니다. 하나님께 헌신 충성하여 복 받은 이야기와, 그렇게 하지 않다가 손해 본 이야기를 하면서 헌신을 촉구합니다. 그러면 그 분위기 속에서 과도한 헌신을 약속합니다. 그런 곳에서 나오는 말들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낮아지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로 세뇌시킵니다. 그런 말들을 듣고 헌신 충성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며 자아의 확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의 결단과 결심이 아무른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가 아무른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어떤 분이 오시기 전에 설교를 들어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늘푸른 교회에 가면 다른 교회보다 더 냉랭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헌신 충성을 많이 하면 할수록 세상의 복도 받고 하늘의 상급도 크다고 해야 열심히 할 텐데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 다른 교회보다 냉랭할 것이라고 하고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럴 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더 바닥까지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버린 자로 드러나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11~13절입니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8절부터 복음을 전합니다.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와 함께 죽으면 살고 그와 함께 참으면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이익 앞에서도 주를 부인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인 당하여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신실하셔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기에 죄인에게 구원이 일어납니다. 이 구원을 받은 자는 나는 주를 버려도 예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믿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