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3~11 장례를 준비한 여인 2020. 1. 12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1)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2)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지난주에 유월절에 죽으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출애굽 하는 밤이 유월절입니다. 그 밤에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은 장자가 살아남았지만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은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피를 바르고 죄 때문에 벌벌 떨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피를 바르지 않고 자기 착함을 믿고 평안하게 자다가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질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양의 피가 뭐라고 피 바른 집은 어떤 악인도 살아남고 피를 바르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착하게 산 사람의 장자도 다 죽이느냐고 따집니다. 이렇게 따지는 것 자체가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자체가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 왜 가느냐고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유월절 이야기를 해 주시면 됩니다. 이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라고 전하면서 교회란 그 피를 말하는 곳이라서 간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를 받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받는다고 말해줄 뿐 아니라 부모가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저주를 자청하는 것입니다(삼상3:13). 그런데 우리도 엘리 제사장처럼 방치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3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성과 약 2킬로미터의 가까운 곳입니다. 이곳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아마도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기에 이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도 나병환자라고 한 것은 지난주에 본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는 무리들과 비교가 됩니다. 자신들이 성전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일을 한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여 격리되어야 하며 성전에도 나가지 못하는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은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린 후에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나드 향은 아가서 에서도 보았습니다. 아주 비쌀 뿐 아니라 휘발성이 강하여 밀봉을 해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병을 깨뜨리는 것은 병의 향유 전체를 한꺼번에 붓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격이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요즈음 금액으로 환산하면 최저 시급으로 계산해도 이천만원이 넘습니다. 요즈음은 인건비가 비쌉니다. 작은 기술을 가져도 일당이 이십 만원이 넘습니다. 이십 만원이라면 육천만원의 가치를 예수님의 머리에 한 번에 부어버렸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26:8). 이들이 왜 화를 낸 것입니까?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서 허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칭찬 하였겠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많이 받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등장할 때에 단 한 번도 좋은 모습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미신보다 더 미신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 작가들이 볼 때에 기독교인들이 그런 모습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여러 기독교 단체의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처방전이 나옵니다. 교회의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의 생태계를 지키지 못하면 교회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도 사람이 무너뜨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자들을 교회라고 하고 성전이라고 하는데 누가 이것을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욕을 얻어먹어도 하늘에 계신이가 비웃으시며 한 아들을 세웠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다고 합니다(2).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이 여인에 대하여 화를 낸 것입니까?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하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칭찬하였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책망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들을 인정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이나 제자들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교회가 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세상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착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착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착한 일이란 예수님의 일만이 착한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절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여기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세상의 착한 행실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이런 모습이 복 있는 사람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빛이 있어야 그것이 착한 행실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루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 말씀을 그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시고 그 혜택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 12:5~6절입니다.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2)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오늘 본문과 배경은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이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가룟 유다가 하는 말이 그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돈궤를 맡고 있는 자이기에 거기 넣은 것을 훔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도둑의 심보라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보이는 일들은 사실 이단들이 더 앞장서서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들이 앞장서서 세상의 착한 일을 해서 우리는 이단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주는 봉사 표창장을 선전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나 가륫유다가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것과 예수님이 좋은 일이라고 하시는 내용이 다릅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을 가만 두라고 합니다. 왜 그를 괴롭게 하느냐고 하시면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에서도 구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구제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향유 부은 여인을 책망한 것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 자기들의 단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돈을 훔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 전하면 되는데 다른 것으로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제자들이 이 여인을 책망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름도 없는 그 한 여인은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셔야 하실 것을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고 말리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교나 다른 종교의 금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아본 여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이 여인이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나드 한 옥합을 예수님께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그가 죄를 용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죄 용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표로 보여준 선지자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 여인을 기억하게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입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예수라는 영화를 보면 바라바와 가룟 유다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영화적 상상이기에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유다도 열심당인데 예수님의 기적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바와 그 일당들과 긴밀하게 연락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로마를 향하여 무력을 사용하게 하려고 팔아 넘겼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이 없지만 오늘 본문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일을 옳은 일이라고 하시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 제사장에게 팔아넘겨버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14:1~2절을 봅니다. “봉독 지난주에 드린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흉계를 구하는데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명절이 지나면 조용히 처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유월절에 죽으셔야 한다고 하시면서 유월절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이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죽임 당하는 분의 의도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자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무명의 한 여인이 안 것입니다.

 

본문 3~9절입니다. “봉독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위를 책망합니다. 그렇게 값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낭비하였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차라리 구제를 하였다면 율법을 지킨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생각들이 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인정욕구가 있었을 것이며 가룟 유다는 돈을 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일도 말하라고 합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봉독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갑니다. 대제사장들이 듣고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1~2절에서 예수를 조용히 죽이려고 모의한 자들에게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기겠다고 하였으니 조용히 처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그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방금 읽은 1~11절까지 앞뒤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예수님을 넘겨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님께 나드 향유 옥합을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6절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최후의 만찬에 바울사도는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 만찬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자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산을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전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의 이야기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말하라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 오히려 죽음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끌어안으시고 하늘에 앉히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린 자들을 그 십자가에서 흰 옷을 입히시고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 자들을 핍박한 자들은 심판이 이르렀다고 선포된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 이후로 재림까지도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과 영생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십자가의 복음에 머물러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