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32~42 겟세마네 동산에서(1) 2020. 2. 9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시간도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입니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육신의 힘을 믿고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 떨어지듯이 기도하시지만 제자들은 다 누워 잤습니다.

 

본문 32절을 봅니다. 감람산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예수님과 열한 제자들이 갑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감람나무 곧 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기에 감람산이라고 하는데 그런 곳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올리브는 생 열매를 압착기에 넣고 기름을 짜 냅니다. 감람산과 겟세마네라는 지명조차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자신이 으깨어지듯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이르러서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라고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라고 한 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 팔 명입니다.

 

33~34절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 세 명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것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라는 말씀은 38절에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본 자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예수님의 영광을 본 자들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별세를 의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고 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깊은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도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자신의 죽으심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죽음 앞에서 놀라고 슬퍼하시며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박윤만씨의 마가복음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감정표현이 마가복음에서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1:41; 3:5; 5:19; 8:2,12,33), “그는 놀라고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33절 후반부) 혹은 내 마음이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오”(34절 전반부)라는 표현은 고대는 물론 현대 그리스도인 청자에게 놀람을 줄 수밖에 없다. 유대에서는 시리아 통치에 대항하여 벌인 마카비 전투 바로 직전에 일어난 한 순교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것은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한 까닭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해 붙잡힌 일곱 아들과 어머니가 죽음의 순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문을 받은 후 순교를 하였다는 내용이다(2maccabees 7:1~40). 그러나 그들보다 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 예상된 예수님은 놀라고 번민하신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내 마음은 슬퍼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고백을 하신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놀라고 번민하고 슬픔 가운데 이끌게 하였을까?

 

예수님의 고백에 사용된 헬라 표현은 칠십인경 시편 41:6, 12(개역개정 42:5,11)42:5(개역개정 43:4)에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영혼아, 네가 왜 슬퍼하느냐’. 의문 대명사를 제외하면 세 단어 모두 예수님의 고백에 등장한다. 시편의 맥락에서 그 같은 표현은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하나님을 향한 갈함 가운데 있는 시인의 영혼 상태를 보여준다. 만일 예수께서 시를 참조한 것이 맞는다면, 그의 번민과 놀람, 그리고 슬픔은 그 역시 시편 저자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단절감을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역 시작 즈음에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기꺼이 받으심으로써 죄 가운데 있는 백성을 위한 메시아의 길을 걸어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처럼, 사역 말미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을 대신하는(10:45) 혹은 많은 사람을 위한(14:24) 죽음을 앞두고 그들이 겪어야 하는 영적 유기 상태를 그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Taylor, Cranfield, Grassmick, Edwards). 이것이 바로 헬라 영웅이나 유대 순교자가 걷지 않았고 또 걸을 수도 없었던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의 길이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 고통과 번민을 시편에서 인용한 것은 좋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시편 42: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11절과 43:4절도 똑 같이 반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편을 참조하여 기도하셨다고 해석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시편의 기자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을 미리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그 시편의 기자도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지만 원수들의 압제로 인하여 가까이 가지 못함을 탄식 시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유기된 자들은 예수님의 이 아픔과 고통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홀로 피 땀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누워 잘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5~3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또 조금 거리를 두시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시기를 구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외에 제자들조차 모두가 영적으로 유기된 자들이기에 예수님의 이 고통을 아무도 모릅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음을 알지만 죽은 자는 죽음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것도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조차 예수님의 이 고민과 고통에는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기도를 하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에게서 저주 받아 끊어지는 그 고통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죄인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37~38절입니다. 예수님 홀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보시니 제자들이 자고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이라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베드로가 제일먼저 가장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고통의 현장에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깨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마음에는 원이로도 육신이 약하다고 하시면서 다시 기도하러 가십니다.

 

39~42절입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깨어 있으라고 하였는데 잤습니다. 두 번째는 이들을 깨워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잤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을 깨워 놓고 다시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세 번째 오셔서 제자들을 봅니다.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다고 하십니다. 그 때란 예수님이 죄인의 손에 팔린다고 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합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자는 제자들을 함께 가자고 하십니까?

 

수요일 저녁에 아가서를 보고 있습니다. 아가서 2장에서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씀을 보았고 지난 주 수요일에는 4장에서 나와 함께 가자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함께 라는 단어가 중요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함께 갑니까? 못 갑니까? 못 갑니다. 그런데 왜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무도 인간의 힘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갈 자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들고 잠시 설치지만 결국은 다 도망간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간 작은 자들 위에 그 손을 드리운다고 스가랴 17:3절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은 너희의 힘으로는 결코 나와 함께 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38절을 다시 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우리가 교회의 어떤 일을 하려고 하다가 못 하겠으면 늘 하는 말이 이 말씀입니다.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빠져나갈 핑계거리로 삼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하시고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단지 살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마음과 육신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간절히 원한다고 하는데 제자들의 마음이 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의 마음을 영이라고 하여도 그 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이라는 단어가 프뉴마입니다. 구약의 루아흐와 같은 뜻입니다. 성령으로 번역하지 않아도 다른 여러 가지 단어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타락한 인간들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시고 떠나십니다. 그러자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도 그 육체로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이 우리 안에 임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13절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사람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는 안 됩니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육신입니다.

 

요한복음 3:6~7절입니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율법 선생인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율법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육이라는 것입니다. 이 육이라는 말과 지금 예수님께서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과 같은 단어입니다. 니고데모가 육신이며 제자들이 육신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었든지 예수님을 따라 3년을 다녔든지 간에 이 육신으로는 연약하여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마음으로 원하여 영생을 얻으려고 율법을 지키고 결단과 결심을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1)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7장이 마음의 원함과 육신의 연약함의 갈등입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자각은 성령이 임하여야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성령이 임하고 나니 자기 육신의 생각을 안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자신이 행한 그 율법적인 행위들이 육신의 일이며 죽음의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법이 죄와 사망의 범에서 해방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3~8절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이것이 십자가복음입니다.

 

9~11절입니다.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2)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다음 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내용을 로마의 이 본문 이후의 내용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연약한 육신인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만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의 선생이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전인을 말합니다. 이런 육신의 생각자체가 이미 선악과 따 먹은 이후의 생각이기에 결코 영의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인간의 힘과 결단과 종교심을 믿는 것이지만, 영의 생각은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평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