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1~12 간음과 이혼    2019. 6. 30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지난주 말씀은 지옥 불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눈과 손과 발이 범죄 하면 찍어 버려서라도 지옥에는 가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윤리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혼에 대한 내용입니다. 모세 율법에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율법조문을 얼마나 악하게 사용하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혼과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기 전에 눈과 손과 발을 찍으라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먼저 봅니다.

 

마태복음 5:27~30절입니다.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난주에 본 본문은 타인을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실족하게 된다면 실족하게 한 눈과 손과 발을 찍어버려서라도 지옥에 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27~30절은 간음과 음욕에 대하여 눈과 손을 빼고 찍어 버릴지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간음과 음욕이란 단순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간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옥과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의 일차 청중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전통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말한 원래의 뜻보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게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전통적인 해석을 따를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지 결정해야 합니다. 너희는 문자대로 간음을 하지 않았으면 간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간음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다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한 것이 간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세상의 것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려고 한다면 이곳도 간음하는 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문자적으로 간음을 하지 않았다면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고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 소경이 되어 있기에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한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없는 그런 눈이 간음하는 눈이기에 그런 눈을 빼버리라는 것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는 것이 간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무리가 몰려듭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늘 하시던 대로 가르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습니다. 시험하여 묻는 것은 올무에 걸려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목이 잘린 것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공격하다가 그 아내의 충동으로 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올무에 걸려고 이혼에 대하여 물어본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은 바로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되물으심으로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무엇이라고 하였느냐고 물으시자 바리새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면 버려도 된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신명기 24:1~4절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 말씀을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가 하면 삼마이 학파는 보수적인 편이라서 음행의 문제로만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고, 좀 자유로운 힐렐 학파는 여자가 밥을 하다가 밥을 태워도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것이 발견되면 그것을 빌미로 아내를 내 보내는데 이혼증서만 주면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당시의 이혼을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은 남자에게만 있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이 조문을 가지고 남자들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내를 버리기 위하여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전통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가 그런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허락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완악함이란 하나님의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그 완악함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혼할 수 없다면 아내를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악함으로 아내를 괴롭히느니 이혼 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보호차원이 됩니다. 이혼증서가 있어야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더 스토닝이라는 영화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스토닝이란 돌로 쳐 죽이는 처형입니다. 이란의 한 마을에 남편이 두 아들을 둔 아내를 버리고 어떤 의사의 뒤를 봐주면서 그 의사의 어린 딸과 결혼하기 아내에게 이혼해 달라고 합니다. 아내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이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를 간음했다고 모함하여 결국 돌로 처형시키는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그 이모가 프랑스 기자에게 전달하고 그 기자가 책으로 출판하고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이혼을 못한다고 하면 이런 식으로 아내를 괴롭히느니 이혼증서 주어 이혼을 허락한 겁니다.

 

본문 6~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결론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모세의 율법을 그렇게 적용해 온 것은 너희의 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하시면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되라고 하셨기에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만드시고 그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둘이 한 몸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타락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이며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즉 한 몸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둘의 연합이 깨어집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벌거벗음을 발견하고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한 몸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한 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이며 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이혼해도 된다는 것은 이미 타락하여 완악하여진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집에서 제자들이 이 일에 대하여 다시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자들도 유대인들입니다. 그들도 모세의 율법을 그들의 전통을 따라 믿고 살아가기에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며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당시는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헤롯의 아내가 자기의 본 남편을 버리고 헤롯과 재혼한 것도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마태복음 19:9~10절입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면 아내가 싫어도 평생 데리고 살아야하니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완악합니다. 그리고 이혼하고 다른 데 장가가는 것이 간음이라면 죄를 짓는 것이기에 장가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이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타고난 자라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태로부터 고자가 되어 나오는 자가 있고 또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받을 자는 받으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24:1~4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아내를 맞이하여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주어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남편이 죽었다면 이미 몸을 더럽혔기에 처음 남편이 그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수치스러운 일이 음행이라면 음행은 돌로 쳐 죽입니다(22:22). 그러면 이 수치스러운 일로 인하여 이혼을 당한 여인이 무엇으로 이혼을 당한 것입니까? 원어를 보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운 말입니다. 수치스러운 말로 이혼 당한 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본 남편이 간음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 약속의 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 선지자들의 말씀을 봅니다.

 

예레미야 3:1~3절을 봅니다.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명기 24장의 말씀과 예수님의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과 이 본문이 다 연결이 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아내를 버렸는데 그가 타인의 아내가 되었다면 처음 남편이 다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받으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진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남편 되신 여호와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남편을 떠나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온 땅에 우상이 가득한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창녀의 낯을 가졌기에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예레미야 3:8~10절입니다.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 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 이스라엘이 음행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증서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남 유다가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행음합니다. 성경의 행음이란 온갖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이런 유다를 다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혼당한 여인을 처음 남편이 다시 받아들이면 이것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4~18절입니다.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 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북 이스라엘이든 남 유다이든 모두가 음행하여 남편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혼증서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는 것이며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은 영원하시기에 그러한 음행한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데 성읍에서 하나 족속에서 둘을 찾아내어 새로운 목자를 세우십니다. 그럴 때에 다시는 언약궤를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에 그 완악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언약궤 안에 있는 율법의 조문대로 하면 모두가 다 간음한 자이기에 버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옛 언약으로 남편이신 하나님이 아내인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끌어내었지만 그 마음은 늘 애굽으로 향합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 안에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신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새 언약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이 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새 언약은 남편 다섯과 살다가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도 용서하십니다. 용서할 뿐 아니라 점도 흠도 티도 없이 정결하고 거룩한 신부로 창조해 내시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