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9:6-10 어린양의 혼인잔치 2010. 2. 7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결코 다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아니하는 내용들을 이미 보았습니다. 바벨론 자체가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세상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든 바벨론 자체가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내용들은 음악소리가 결코 다시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가 결코 다시 보이지 않고,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들리지 않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보이지 않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것은 심판의 연기만 세세토록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찬송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더 이상 햇빛이 필요 없을 정도로 참된 빛이 비취고, 신랑신부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이 바로 오늘 보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리는 곳입니다. 지난주에 할렐루야가 세 번이나 외쳐지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6-7절에서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음녀가 세상을 통치하던 세상은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기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통치가 즐겁고 기쁜 것입니까?

마태복음 20:25-28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의 통치자와 예수님의 통치 방식이 이렇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바쳐 섬겨주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단지 섬겨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새벽 기도회 때 호세아서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하여 살다가 다시 바람을 피우는 아내를 값을 주고 데리고 옵니다.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장가드는 것으로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바벨론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늘 좋아하는 것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아름다음과 영광이라는 바벨론의 유혹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것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여도 여전히 땅의 것에 마음이 빼앗기고 간혹 위엣 것을 생각하여도 땅의 것의 연장선상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백성이 다른 곳에 마음 빼앗기는 것을 그냥 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지하려고 하는 것들을 다 무너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애굽을 의지하면 애굽을 미약하게 해 버리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면 앗수르가 망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의지하면 바벨론이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면 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가느냐고 항의를 하겠지만 그러나 참으로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까를 물으신다면 무엇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나는 자식이 없는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상급이라고 하니 자기에게 상을 주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식이 없으니 집에서 기른 종이 자기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식이 없어서 낙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은 상급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된 것이 상급입니까? 이삭을 받은 것이 상급입니까? 요한복음 8:56절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다가 보고서는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그가 바란 상이라고 여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예수님의 대신 희생의 의미를 알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상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최고의 복이여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3:29절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간다는 말을 듣고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 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이 신랑을 예언하였으니 신랑의 친구가 되지만 신약의 성도는 신랑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기쁜 것입니까? 신랑의 친구입니까? 신부입니까? 신부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방식으로 차별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어린 자도 그보다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아브라함이 선지자들이 신랑의 친구가 되는 기쁨을 그렇게 기뻐하였는데 우리는 신부가 된다는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뻐하라고 해서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언의 영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요한이 너무나 감격하여 그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나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온 말씀이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해석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소유격으로 볼 것이냐 목적격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리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 모든 예언의 핵심이다. 2) 예수가 주신 증거는 예언의 핵심이다. 3) 예수께서 주신 증거는 예언의 핵심이다. 4) 예수에 대한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이다. 5) 예언의 영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증언 할 것이다. 6) 예수의 증언을 가진 사람은 예언할 것이다. 여러분은 몇 번이 자연스럽습니까? 모두가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언 하는 것은 예언의 영, 즉 성령이 임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고대할 것입니다.

 

이제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가 즉 성도가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부의 옷입니다. 그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입니다. 이 옷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봅니다.

 

요한계시록 3:4절입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면 자 몇 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더럽히지 아니한 옷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의롭다고 하여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고 다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옷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며 예수님의 의에다가 자기의 의를 덕지덕지 발라서 더럽힌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나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련하고 벌거벗은 것입니다. 그래서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합니다(3:18).

 

계시록 7:9-17절을 봅니다. “봉독”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찬송을 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 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십니다. 즉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신부가 준비한 것은 자명해 집니다. 무엇을 준비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됩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준비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완벽한 준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결코 이런 준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시록 19:8절입니다. 이렇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우리가 입고 싶다고 입는 것이 아닙니다. 허락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고린도 전서 1:29절과 31절의 말씀처럼 아무도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부가 잘 차려입고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신부의 공로가 되면 신랑의 공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부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음란한 고멜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자신의 피로 의롭게 하여 주셔서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허락하셨기에 이 세마포 옷을 입게 되는데 이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행실로는 결코 우리의 죄악을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59:5-6절입니다.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독사의 알을 품은 것이 우리의 사상이기에 그런 사상으로 나오는 행위로 옷을 짜는 것은 거미줄로 짜는 것과 같아서 옷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자기 자신인 줄 아는 사람은 성령이 임하여야만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거저 입혀 주시는 의의 옷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