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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에베소서 1:13~14 성령의 인침 2012. 6. 2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들마다 자신의 강조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제목을 ‘성령의 인침’이라고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단어를 말하라면 ‘그 안에서’입니다. 13절을 그 안에서를 빼고 읽어봅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렇게 됩니다. 만약 그 안에서를 빼 버리면 우리가 구원을 받고 약속의 성령의 인침과 보증을 받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가장 중요한 단어를 ‘그 안에서’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의 인침과 보증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시작을 하는가 하면 이 본문에 대한 주해서과 설교 집들을 여러 권 보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 같은 경우는 이 두절을 가지고 6번에 걸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제목만 말씀드리면 ‘듣고 믿었고 바랐었다’, ‘성령으로 인침’, ‘인침의 본질(1)’, ‘인침의 본질(2)’, ‘참된 체험과 기만적인 체험들’, ‘인침에 관한 난제들과 문제점들’, ‘우리 기업의 보증’ 제목만 들어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의 말씀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른 것 또한 보여줍니다. 특히 보수주의와 오순절파의 해석이 다릅니다.

 

지금은 이런 논쟁이나 토론들이 시들하여졌습니다. 제가 청년 때만 해도 이런 논쟁들이 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성령의 세례인가? 성령의 인침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의 세례와 인침이 별개인가?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의 충만이 어떻게 다른가? 이런 제목을 가지고 열띤 토론들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청년 때에 장유 수양 관에서 수련회를 가졌는데 지금 고신 총회장인 정근두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였습니다. 이 분이 로이드 존스 설교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인데 그 당시 고신에서 금기시된 신오순절 적인 주장을 조심스럽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처음에는 보주적인 입장에서 나중에 믿는 것과 성령의 인침을 구별한 것입니다. 아마 그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과연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는가를 상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복잡한 이야기하지 말고 간단하게 이렇게 하면 구원받고,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비결만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마치 대학이 취업 학원이 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대학은 말 그대로 큰 공부를 해야 하는데 큰 공부는커녕 먹고 살기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것도 자본주의의 폐해입니다. 모든 성공의 기준을 자본의 소유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향이 교회에도 그대로 밀고 들어와서는 진리에 대한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란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를 척도로 하는 실용주의가 진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현 정부도 실용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국민들은 이것이 좋다고 투표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을 봅니다.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이방인을 말합니다. 11~12절에서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말하고 13~14절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을 성령께서 인을 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복음을 듣고 믿어야 성령이 자신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우리의 역사 내적인 경험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이 주 안에서 되기에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모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일어난 일이기에 모든 아담의 혈육적인 후손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만이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들의 결국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 즉 구원의 복음을 들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은 주 안에서 되는 일입니다. 주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복음의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은 자에게 성령으로 인을 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식의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적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임하여야만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행위의 조건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논리적인 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롬8:15, 갈4:6). 또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고전12:3).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을 친 증거는 주 안에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이 성령의 인친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만 자신의 결단과 의지에 초점을 두거나 다른 표적과 기적 쪽으로 나가게 되면 진리의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이나 체험이나 표적과 기적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성령의 인침의 역사를 말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참된 체험과 기만적인 체험들을 구분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침에 관한 난제들과 문제점들을 제시합니다. 오늘 이런 문제를 다 말씀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수련회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주의할 점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을 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탄도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것을 따라가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믿는 자들은 표적과 기적이 아니라 아무른 표적도 기적도 아닌 저주 받아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된 표적과 기적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치심이 무엇인지 분명하여 집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마음에 확정이 되면서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학습으로 그렇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본인이 알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믿는다고 하여도 도저히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이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에 대하여 두 곳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20~22절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21~2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가 또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을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자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씀에 아멘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령의 인 치심과 보증이며 기름 부으심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봉독” 5절에서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보증이 주어진 자들은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몸의 구속이 완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장막이란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이 몸이 무너지면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황금보석 꾸민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을 우리도 입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인친 자들은 이것을 바라고 사모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6~10절의 말씀을 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런 자들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이 인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봅니다.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인친 자들은 성령이 또한 보증이 되십니다. 여기서 보증이라는 말은 보증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동산을 구입하려면 계약을 하고 보증금을 주어야 합니다. 약 10퍼센트를 주는 것은 내가 반드시 그 물건을 사겠다는 의지가 보증금입니다. 그러나 보증금을 주고 나서 알아보니 그 물건을 사면 더 큰 손해가 된다면 보증금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물건이 일천억 정도 나가는 물건을 일천 억을 다 주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보증금을 일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몽땅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행20:28). 자가 이들을 주셨습니다(롬8:32). 그러므로 성령이 보증금이 되신다는 말씀은 보증금의 일부만 지불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사셨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령의 인침이며 보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여시키십니다.

 

마태복음 13:44~46절을 봅니다.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천국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천국이라는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였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는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을 위하여 우리의 무슨 소유를 다 포기하였습니까? 이 말씀대로라면 저와 여러분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다 판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유 전부이신 예수님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사신 것입니다.

 

로마서 8:28-3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의롭게 되었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이 역사 속에 살고 있기에 이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엡4:30). 그러나 이미 확증된 이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주신 분이 그 아들 안에 있는 하늘에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그 어떤 피조물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인친 자들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엡1:6).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찬송이 됩니다(엡1:12). 그리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엡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