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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1:15~19 바울의 감사기도 2012. 7. 1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은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도시 사람들은 비록 농사를 짓지 않지만 반년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마치 율법의 절기를 오늘날에도 지켜야하는 것처럼 맥추감사절을 지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 있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복을 받기 위하여 맥추감사절을 지켰는데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갈라디아서 3:10~14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를 받습니까?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맥추감사절을 지키라고 한다면 다른 절기들도 다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되지 못하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이미 구약에서 증언 하였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는 저주밖에 받을 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속량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에베소서 1:3~14절이 헬라어로 한 문장으로 된 찬양입니다. 오늘부터 보는 15~23절까지 역시 한 문장인데 이것은 간구로 되어있습니다. 그동안 몇 달에 걸쳐서 본 말씀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인사말을 하자말자 터져 나온 찬양이었습니다. 1~1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봉독” 이런 말씀에 찬양과 감사가 나옵니까? 지금 나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잠간의 순간이라도 이런 말씀에 감사할 것입니다. 이런 찬양과 감사가 성도에게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인하여 감사하면서 동시에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기도합니다.

 

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방금 읽은 1~14절 전체를 받는 접속사입니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는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소식을 듣고서 기도할 때 마다 감사를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감사하는 그리스도 안의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을 보려고 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열심과 행위를 보고서 믿음이 좋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40일 금식기도를 하였다고 하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를 몇 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면 이것도 믿음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또 오지에 선교를 가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이런 예들은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믿는 것이 거의 다 라고 봅니다. 저의 이런 말에 발끈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믿기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오늘 위구르와 러시아로 한 달간 단기선교를 가는 청년 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와 함께 동행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일은 실컷 하였는데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 열심만 가득 풀어놓고서는 주의 일을 했다고 뿌듯해 할 수 있는 것이 청년 때의 열심들입니다. 조그마한 동기와 자극을 주면 목숨 바치겠다고 나서는 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들고 뛸 깃발만 들려주면 무슨 깃발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인데 대학 때에 선교단체에서 활동한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선교단체의 일을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공부보다 주의 일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할 시기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취직이 안 되면 나중에 선교회 간사니 또는 자비량 선교사니 하면서 생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주의 일을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제가 아는 사람도 그런 길로 갈만한 사람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서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에 가서 지금은 의사가 되어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잘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나서는 무엇이 주의 일인지에 대하여 새롭게 정리가 된 것입니다. 작년쯤에 만나보니 정말 자신은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라서 예수님의 보혈 한 방울만 자기에게 떨어지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몽골의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런 과정을 ‘내려놓음’ 이라는 책을 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원래 의도한 방향으로 읽혀지지 않아서 ‘더 내려놓음’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글을 한 토막 소개합니다. “아무것도 안하셔도 되고 거저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시는 일을 보고 오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시고 그냥 떠나세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 내가 헌신하고 계획하고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충성하였는데 이런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대체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29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거저 내가 열심히 하는 나의 행위를 믿음으로 내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서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주 예수 안에서 너희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은 주 예수 안에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 안에서 믿음이란 나의 뜻과 계획이 무너지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주 안에서의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내가 결심하고 내가 띠를 띠고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압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범사에 종교성이 많아서 믿음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합니다.

 

특히 어르신들을 전도하면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아무른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공로를 바쳐야 천국을 갈 것인데 그러할 힘도 능력도 없으니 거저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에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면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세상의 풍속이 주는 믿음이 가득한지 말씀과 성령으로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야기하여도 돌아서면 벌써 나의 행위와 가치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말을 한마디 하여도 글을 한줄 써도 나의 자랑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설교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왜 설교를 하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런 죄인도 예수님의 피는 용서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3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유대인들은 할례를 육체의 자랑으로 여깁니다. 처음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은 육체의 능력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할례였습니다. 할례 행하기 전에 자기 육체의 실력으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이루심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육체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임을 보이시기 위하여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할례 후에 태어난 자식이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참 할례 파란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를 믿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의 믿음이란 나는 나를 절대로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기에 예수님만을 믿습니다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나의 행위를 끼워 넣을 자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2:23~25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23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25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의 믿음이란 얼마나 자신이 믿음이 없는지를 알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분이신 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자기의 믿음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말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오해하는 단어가 또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방금까지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믿음으로 여기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반드시 성도를 향한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사랑이 나오는가 하면 같은 믿음의 형제를 만났기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아도 사랑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6절을 봅니다. “봉독” 주 안에서 갇힌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에 권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서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라고 합니다. 왜 사랑 가운데 용납해야 합니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1:3~14절의 복을 받고 믿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가 되는데 무엇이 하나인지 목록만 봅니다. 몸, 성령, 소망, 주, 믿음, 세례, 하나님이 다 하나이며 한분 이라고 합니다. 각각의 기능은 다르지만 한 몸입니다.

 

에베소서 5:29~30절입니다.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합니다. 손가락이 부러지면 어떻게 합니까? 귀찮다고 부러뜨려서 떼어버리지 않습니다. 수술하고 깁스하여 온전히 붙어지도록 보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된 교회를 돌보십니다. 그렇다면 함께 돌보심을 받는 지체들이라면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을 강조한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타령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하고 있습니다. 온통 사랑과 이별 그런 것이 노래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들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희생한다고 합니다. 내가 깨끗이 포기하고 희생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하는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를 속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우선이 아니라 주 안에서 믿음이 우선입니다. 주 안에서 참된 믿음이 주어지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 난지를 함께 공감하기에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7~2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독한 자기사랑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행위가 아니기에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왜 사랑이 없느냐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기 안에 이루어진 그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혹 만나지면 서로 사랑하는 일이 자기 몸을 돌봄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