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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1~7 본질상 진노의 자녀 2012. 9. 2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 3절을 보시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특별하게 나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말합니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택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조차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란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특징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자들이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는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모든 것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 광고에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광고멘트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아내가 잘 해야 한다는 그런 광고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곧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은 자신이 자신을 관리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복과 화도 자기하기 나름이고 사후의 세계도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자들이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생각을 심어준 자가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의 일입니다. 이런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인간은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은혜를 결코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 아무나 붙들고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웬 미친놈 다 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멋있는 전도들을 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들을 예수 믿으면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먼저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알겠습니까?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인간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으로 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라면 욕구가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도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나서 이런 모든 욕구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욕구가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만족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갈라디아서 5:17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자신은 평소에 착하고 고상하게 살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금요일 새 언약 공부를 하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람피우는 것이나 커피 마시는 것이 같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나쁘고 흉악한 죄만 죄로 여기도 고상한 취미생활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요즈음 커피 마시는 카페가 한 집 건너 한 집이 생기는 중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지 그런데 그런 곳에서 드립커피의 종류와 향을 구별하면 고상해 보입니까? 그것도 동일하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만나서 취미를 물어보면 한때 독서와 음악 감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좀 고상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음악 감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와 마음이 클래식 음악 감상을 원하는데 어느 정도로 까지 그 욕망이 이어지는가 하면 앰프 한 대에 수억 원짜리가 있습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은 음악이 건조하다거나 촉촉하다거나 하는 분별을 할 정도의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죄라고 하겠습니까? 멋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파괴된 사나이’라는 영화에서 목사의 딸이 납치당합니다. 이 목사는 의대를 다니다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납치를 당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믿자고 설교하고 기도하였지만 결국 딸이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 욕하고 닥치는 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8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자기 딸을 보게 됩니다. 그 딸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그 딸을 유괴한 자가 많은 어린 아이를 납치하여 돈을 받고서는 살해한 사람입니다. 그의 취미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입니다. 수 억 원 하는 앰프를 사기 위하여 유아를 납치살해 하여 돈을 마련하여 갔는데 앰프를 팔려고 하는 사람이 수준이 안 된다고 팔지 않겠다고 하니 그를 살해하고 앰프를 훔쳐 갔습니다. 음악 감상을 위하여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일이 이렇게도 나옵니다. 너무 심한 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두 사람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4:1~12절입니다. “봉독”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에 가인이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왜 나의 것을 받지 않고 아벨의 것을 받느냐고 화가 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와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드렸기에 오늘은 가인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바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가인이 화가 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경고를 하십니다.

 

7절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죄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분노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제물을 받아 주지 않으셔도 마땅한 죄인이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미 아담의 후손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상태를 죄가 너를 원한다고 합니다. 죄가 너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동생을 살해하였습니다. 좋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하여 유아를 납치 살해한 인간이나 가인이나 간에 그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시편 51:1~5절입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표제어를 보시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등장할 때부터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사무엘로부터 받았기에 등장합니다만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한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물리칩니다. 이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처녀들의 노래가 나오면서 일약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의 사위로 삼았지만 왕위를 노린다고 하여 늘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자신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서도 정의와 공의를 일삼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충성된 여호와의 군대로 전투하고 있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알리바이를 조성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특별휴가 보내어 집에 가게 하였지만 여호와의 전쟁 중에 아내를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왕궁 막사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술을 마시게 하여 보내도 여전히 왕궁의 군인들과 함께 자는 우리아를 죽이기 위하여 요압장군에게 밀서를 보냅니다. 자신을 죽이라는 밀서를 들고 가서 전달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아를 장사지내고 밧세바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나단 선지자가 책망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어 책망을 할 때에 자신인줄 알지 못합니다. 부자가 자기의 많은 양을 두고서 가난한 자의 가족과 같은 양을 빼앗아 손님을 접대하였다는 말에 다윗은 그런 자는 죽을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네 배로 갚아야 하기에 네 배로 갚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그 죽일 놈이 바로 당신이라고 하였을 때에 이 회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런 간음과 살인을 왜 하였습니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바를 다윗도 이기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선한 왕으로 살았지만 그것마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지 아니하시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시면 살인과 간음을 하여도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자신이 죄악 중에 잉태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 용서 받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리에서 산자의 자리에 이른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어느 정도로 완벽하게 지켰는가 하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입니다. 율법의 의가 아닌 오직 예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은 다 죽여야 한다고 살인까지 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한 열심을 낸 것이 바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완전히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제야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 늘 더럽고 추한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고상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모습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이 세상의 신은 진선미를 따로 구별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의와 불의를 구별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이미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사실은 감추어둡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들도 성경의 이렇게 분명한 말씀들도 여러 가지 해석으로 왜곡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꾸만 인간에게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소품으로 사용되는 진흙입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긍휼의 그릇은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진노의 그릇은 끝까지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가치를 주장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로마서 5:12~21절을 봅니다. “봉독”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지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아도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인데 한 사람 아담으로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면 은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8~1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확정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아는 자가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모든 삶에 왕 노릇 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