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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1~7 긍휼의 풍성 2012. 9. 2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지난주에 경기도에서 만난 어떤 분이 지난주일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주일 설교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가 조금 있다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제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을 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는데 그분은 ‘그래 맞아!’ 하는 말이 연속으로 나오더랍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북돋아주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하고, 조금만 더 하나님을 잘 섬기면 엄청난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로마서 1:18~25절을 봅니다. “봉독” 에베소서 2:1~3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어떤 모습인지 로마서 1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라면 이 사람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그대로 내 버려두시면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살며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더 많이 투입하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즈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나보았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따라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보니 이단들의 교리에 세뇌(洗腦)가 되었습니다. 세뇌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집중반복입니다. 이단들의 교육시간은 일주일에 보통 12시간에서 15시간입니다. 그런데 일반교회는 일주일에 부지런히 교회당을 나가도 말씀 듣는 시간은 두 세 시간도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말씀공부보다는 교회 성장이 더 급하기 때문으로 봅니다. 성경공부를 해도 교회성장을 위한 공부들이 많습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 구역성장을 위한 52주공과 등이 성경공부 교재로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씀의 본질에 착념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마음이 가 있을 동안에 이단들은 그런 교회들을 비판하면서 말씀을 공부시킵니다. 처음에는 정말 성경적으로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천지의 공부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구원파의 내용을 보아도 처음에는 정말 성경대로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단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묘한 해석을 통하여 특정인을 따르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에게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내 버려두면 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구원에 이르는 자들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이 구원받은 특징은 자신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이런 저런 핑계들을 됩니다. 때로는 용감하게 자기의 죄를 시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하여 그렇게 합니다. 친구라는 영화에서 유오성이가 살인지시를 내렸는데 밖에서 손을 썼습니다. 자신이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자신이 살인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친구가 면회 와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쪽팔려서 그랬답니다. 건달의 자존심이 상해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만 살아가는 거지들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을 최대한 불쌍히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구걸이 끝나면 어떻게 합니까? 중국에서 그런 일이 많이 보도 되었습니다. 구걸 끝나면 멀쩡하게 옷 갈아입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로 구원을 베푸신다고 하시면 자신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짓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였을 때에 자신이 긍휼을 입어야 하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봅니다. 우리 성경에는 접속사가 없습니다. 3절과 4절 사이에 ‘그러나’가 들어가는 것이 더욱 분명한 번역이 됩니다. 1~3절은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피하여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죄 아래 갇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죄 아래 가두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무엇으로 죄 아래 가두었습니까? 성경으로 가두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로마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1:30~32절입니다.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죄 아래 갇혔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갇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이셨습니다. 율법을 주어서 죄 아래 갇힌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가졌다는 자들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인애, 자비, 사랑 등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을 입은 자는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자신이 죄인이라서 하나님 앞에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주님께 자기를 떠나시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다시 4절을 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선행(先行)적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는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게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믿어준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지난주에 구원파에 빠진 사람과 이야기 하였습니다. 당신이 무엇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까? 오직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은혜로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도 하고 속죄의 찬송도 부른다고 합니다. 이단이 진화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가는 단체를 지적하니 갑자기 불같이 성을 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기존의 교회에 수 십 년을 다녔지만 이런 말씀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여기서 가르쳐주었기에 우리 단체를 공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과 특정 단체에 두고 그 단체와 그 사람을 택한 자신의 행위에 두고 있기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원인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어떻게 살려내십니까? 5절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괄호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괄호로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없는 경우에 이렇게 표시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에베소서 1:17~23절을 봅니다. “봉독” 우리가 앞에서 상세하게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게 되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강력하게 역사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그 분이 현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일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올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혀놓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별로 놀라는 반응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지금 이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졌는지 영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믿자는 노력을 해서 믿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최면(催眠)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설득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은혜로 믿게 되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들이 다 믿어집니다. 우리가 믿자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긍휼에 풍성하신 그 크신 사랑을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시 잠간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세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면 이제는 그런 일들이 시들해 집니다. 물론 나이가 들고 늙어서 재미가 없어서 시들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나섭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에 맞게 또 다른 재미거리를 찾아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골로새서 1:1~6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5~6절입니다.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져 있습니다. 이것이 묵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역사 속에서 우리의 몸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땅의 것을 완전히 버리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땅에 속하여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같이 이야기를 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같이 교회 다니는 사람도 몇 시간 함께 있으면서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지 마련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말하는 것과 관심 두는 것이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만 말하면 가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면 위의 것을 찾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져 있는 사람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내용입니다. 이런 자들은 땅의 이야기만 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보다는 긍휼의 마음이 듭니다. 자신도 전에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어떠한지 날마다 더 풍성하게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