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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4~10 성도의 지위 2012. 9. 9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골짜기가 깊으면 산이 높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죄의 실상과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높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은 거의 모든 것이 피상적입니다. 무언가 진득하게 오랫동안 집중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야하는 일조차 빨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내를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빨리 인내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제대로 전하지도 않고서 거저 교회당에 나오기면 하면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며 이미 천국은 따 놓은 것이라고 세뇌시키면서 그 정도로 만족하지 말고 세상에서 복을 받고 천국에서 높은 자리 차지하기위해 교회일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의 특징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예를 든 이런 모습이 바로 세상의 풍속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단지 교회당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로 둔갑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속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그런 말들에 아멘하고 달려가는 것은 그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교회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세상과 벗되고자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하고 천국에서도 높은 자리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약4:8).

 

교회에 다니지 않을 때도 세상과 벗되고자 하였고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과 벗되고 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18~19절입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세상과 벗되고자 하면 하나님의 원수인데 여기서는 자신의 신이 욕망을 따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바울사도는 교회를 향하여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있을 때에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역시 하나님의 원수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리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대한민국에서 전도란 교회 밖의 전도보다 교회 안의 전도가 더 시급한 상황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공격을 당하는 이유는 교회가 위엣 것을 찾지 않고 땅엣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위엣 것을 찾으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교회도 땅의 것을 생각하고 차지하려고 하니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여 믿는 자들이 된 초대교회 성도들을 온 백성이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끼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집에서 성찬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성도의 교통이 일어나는데 네 것 내 것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믿게 된 자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분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곧 과부와 구제문제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면 적어도 교회가 이 당시에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것은 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물건을 통용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자기의 소유가 많아지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니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신분을 안자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다 도시에 나와 있고 부모님은 농촌에 계셨는데 연로하셔서 자녀들이 있는 도시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사를 위하여 농촌에 갔습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별고 가져올 것이 없었습니다. 농사짓는 도구들 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좀 값이 나가는 것들은 성의껏 얼마씩 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왜 그렇게 다 나누어주었습니까?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까?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으로 보면 창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 어디에 소속이 되어 있습니까?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일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었기에 때가 되어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나니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썩어질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속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 4절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이라고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5~6절입니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로마서 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는 것은 범죄의 결과로 인한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내어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받으신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 홀로 하신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를 연합시킵니다.

 

로마서 6:1~7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 ‘합하여’ 또는 ‘연합하여’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모든 자들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지금 믿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료된 상황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신 자리이기에 역사의 발전이나 이런 것은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성된 그 언약을 이 역사 속에 펼쳐놓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두루마리 책을 펼치시는 모습으로 요한계시록 5장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보좌에 앉으신 그 자리에 자기 백성도 함께 앉히셨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성도의 지위를 높게 표현한 곳이 없습니다. 성도의 신분이 예수님의 자리에 함께 앉혀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 인식하기로는 땅에 발 딛고 살아가기에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완벽하게 완성하시기에 이미 완료된 상황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미 의롭고 영화롭게까지 되었습니다(롬8:30).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미 완료가 되었지만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장차 그곳에 앉게 되며 또한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3:21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게 하리라” 여기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잠간 주는 부요함에 눈이 멀었느냐고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앉아야 할 자리가 세상의 안락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보좌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20~21절입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앞에서 이 앞부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 책망합니다. 그런 자들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 분이 오시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도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이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보좌에 앉혀져있기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하늘에 앉혀져 있는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성경의 이런 말씀들이 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의심 없이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한곳만 더 봅니다. 골로새서 3:1~6절이니다. “봉독” 종종 찾아보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들에 마음으로부터 아멘이 되신다면 이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위이며 신분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분에 속한 자들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붙들고 그것을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할까요? 그런 것들을 나누어주기를 원할까요?

 

여전도회 갔다가 몇 분 집사님과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정말 다 버리고 아주 간단한 최소한의 도구만 남겨야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늘의 보좌에 앉혀져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나올 때에 몇 가지는 가지고 오지만 땅에서 하늘로 이사 갈 때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 듬뿍 안고 가면 됩니다.

 

성도의 지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곳만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2~3절입니다.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성도가 세상과 천사마저 판단할 자들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세상의 법정에 고발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세우느냐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노회에서도 총회에서도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세상의 판사들이 교회를 책망하는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 그런 사소한 것들로 고소를 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또는 교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성도는 세상과 천사마저 판단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판단에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었다고 실패하였다고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라면 오늘 말씀들에 아멘이 되면서 잠시라도 쉼이 있을 것입니다. 이 쉼이 영원으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