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8~22 금식 논쟁 2018. 10. 14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2:1~3:6절까지 논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걸때에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금식에 대한 논쟁이며 다음 주에 볼 내용은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런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전통을 따라 엄격하게 지켜오는 내용들을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옛것의 완성과 새 것의 이루심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2)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4~15).”

 

본문 18절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유대인들은 금식을 하는 날이 율법에 정하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해야 합니다(16:31). 그 외에는 특별히 날을 정하여 금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여 금식 기도합니다(삼상7:6). 이 금식은 우상을 버리고 주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일들로도 금식을 합니다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몇 가지 금식일이 추가됩니다.

 

스가랴7:1~3절입니다. “1 다리오 왕 제 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오월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오월에 금식한 이유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억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아직도 그런 금식을 해야 하는지 선지자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4~7절입니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여호와의 대답입니다.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다고 합니다. 칠월은 그달리야의 암살을 기억하기 위한 금식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무너지고 지도자가 죽은 날을 기억하면서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금식하고 애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든, 먹고 마시든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책망하십니다. 그런 금식보다 중요한 말씀이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8~14절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1)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금식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로운 재판을 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학대하였기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옛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인애와 긍휼로 살면 되는데 다시 금식 일을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께서 책망을 합니다. 그런 의식들을 과연 누구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하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서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가랴 8:1~3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고쳐지지 않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질투하여서 자신이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에 거하심으로 진리의 성읍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망치지만 하나님은 이루어내심을 보여주십니다.

 

스가랴 8: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넷째 달은 금식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구멍이 뚫어지는 때를 상기하는 것으로 봅니다. 열째 달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 때로 봅니다. 이러한 금식을 칠십 년을 하고 돌아왔지만 고쳐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돌아오셔서 그 금식의 날들을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바꾸신다고 합니다.

 

금식에 대하여 이사야 58:1~5절을 더 봅니다.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 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처럼 날마다 공의를 구하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금식하는데 왜 우리를 돌보고 알아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금식을 하면서 오락을 구하고 논쟁하고 다투고 종들에게는 온갖 일을 시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스가랴서에서 금식을 책망한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고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입니까?

 

6~7절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 돌아오심으로 금식일이 변하여 즐거움과 기쁨이 되게 하시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힐난하는 자들은 스가랴 시대에 아직도 금식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자와 이사야 시대에 자신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스가랴서와 이사야서의 말씀을 찾아본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금식에 대한 말씀의 성취와 이사야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지난주에 본 대로 만왕의 왕의 식탁에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천국잔치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어떻게 금식을 할 수 있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현장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빼앗기면 그 때에 금식을 할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종종 금식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언제 금식을 해야 할 때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해지시면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안에 그리스도 주가 아니시고 분명하지 않으면 정말로 금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 21~22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은 우리도 이해할 수 있는 생활의 일상적인 말씀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깁게 되면 오히려 헌 옷의 해어짐이 더하게 됩니다.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보관을 합니다. 그런데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포도주가 발효하는 힘으로 낡은 가죽 부대를 터트리게 되면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으로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아 출애굽 시켜 광야를 거처 약속에 땅에 들여놓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애굽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불평과 불만이 생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애굽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돌 판에 기록된 옛 언약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하는 새 언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은 새 언약의 완성으로 성령을 보내시면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시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22:20).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5:17). 그러므로 옛 시각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6절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율법 조문으로 전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오직 영으로 한다는 말씀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새 언약에 주의 영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율법 조문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께로 돌아가면 모세의 수건이 벗겨집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얼굴과 얼굴로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게 됩니다. 이 복음을 전함이 참된 금식입니다. 금식의 날이 기쁨의 날이 됩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일이 예수님의 피로 이룬 새 언약을 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