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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16~26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2016. 11. 6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오셨습니까? 예수 믿어서 세상의 복을 받고자 오신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그런 복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에 왜 왔습니까?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이것은 아닌데 답답하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저의 설교를 듣고서 오신 분들이 많은 줄 압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은 이혼하는 만큼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게 교회를 옮기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답답함이 해결이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다 이루셨는지 아셨습니까? 영생을 얻었습니까? 생명을 얻었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아니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소원하십니까?

 

오늘 본문 16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평행구절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시는데 마태는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선한일이라고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어떤 인간이 선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식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마태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질문합니다.

 

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하시면서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하시면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는데 예수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합니다. 영생이란 말 그대로 하면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영생을 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생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에는 생명의 부활로 나와서 영생하는 자가 있고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 영생하는 자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29절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질문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선한 일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선한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악한 일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18~19절입니다.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무슨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의 전부를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일부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내용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부모공경과 같은 내용들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청년을 무엇이라고 대답을 합니까?

 

20절입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주신 의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라고 주셨는데 그 내용이 감추어져 있기에 이들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게 되려고 얼마나 율법의 조문을 지켜왔는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율법의 한 조문을 지키기 위하여 부칙까지 만들어서 다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의 의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산상수훈에서 다 살펴보았습니다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면서 율법의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도 유대인들은 실제적인 음행을 하지 않으면 간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동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의 의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수준이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화있을 것이라고 저주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 청년에게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온전하여 지려고 하면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계명을 지켰다는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재해석하여 지킨 것이지 그 율법의 뜻과 의미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주고서 이혼하라는 말씀도 그들이 악함으로 주어진 것인 줄 모르고 이혼증서만 주면 이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여 지켰다고 한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음으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이 부자였습니다.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서 관리라고 합니다. 부자이면서 관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켜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만하면 족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하려면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부자였기에 근심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자는 평소에 율법을 지킨 것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지킨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19:18).

 

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면 여러 이웃이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주변에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그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다면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율법을 재해석하여 주는 율법 선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 안에는 돈을 사랑하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한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인간의 죄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3~24절입니다. 그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옛날 성문이 닫히면 급한 전령만 오고 갈 수 있는 귀퉁이의 작은 문을 바늘귀 문이라고 하였기에 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을 저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자가 됨을 버린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사람이 노력하여 바늘 귀 만큼이라도 회개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낙타가 들어갈 만큼 크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런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어서 성공하고 부자 되라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게 하는 것입니까? 못 가게 하는 것입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부자 관원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고 해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도망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라간 제자들도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안 됩니다.

 

25절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같은 자들은 저주를 받을 자들에 속합니다. 그리고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도 다 죄로 인한 결과로 봅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이며 관리인 자는 율법도 다 지켰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제자들도 구원을 받는 것, 영생을 얻는 것, 생명을 얻는 것, 천국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로 들어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율법을 잘 지키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 부자 청년이 재물을 영생보다 사랑하여 돌아선 것입니다. 영생이 바로 눈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 앞에서 결국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재물의 부도 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라는 것도 그 사람의 소유로 삼으면 그것도 부자가 된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 아래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 없음을 알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11:32). 그런데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나오는 자들은 율법을 주신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은 오직 긍휼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일체의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3:19~26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을 주신 의도를 사도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 피 뿌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하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죄로 삼으시고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그와 함께 살려내시는 길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버림받으심은 우리에게로 버림받으셔서 버림받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시고 짊어지시고 그 생명으로 이끌어 넣는 일이 바로 십자가로 일어난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난 1031일이 종교개혁 499주년 되는 날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말씀을 깨닫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년이 종교개혁한지 500년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교회가 개혁교회의 원리마저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이 원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혁교회라고 하면서 하는 일들은 온갖 사람들이 만든 프로그램들과 욕망을 부추기는 구호들과 표어들만 난무한 현실을 봅니다. 칼뱅의 오대교리라는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에 대한 내용들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개혁의 원리들은 교회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복을 받고 천국 상을 쌓자는 말을 한다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되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본문 26절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이 말씀을 창세기 18:11~14절에서 봅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13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이며 사라는 생리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불임여성인 사라가 생리마저 끊어졌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를 내년 이 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장막 문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전혀 믿지 못한 내용입니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람들은 자기 소원의 성취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무능하셔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세전에,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그 내용을 이루시는 일에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언약을 이루시는 배경이 인간의 불신과 비웃음과 조롱이 배경이 됩니다.

 

마태복음 27:27~30절입니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누가 이렇게 조롱받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겠습니까? 이어지는 조롱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서 조롱합니다.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구원한다고 하느냐며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저주 받음과 조롱과 수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구원을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로마서 4:17~25절입니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2)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과 같이 율법을 다 지켰다는 저런 자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다는 이 말씀을 창세기와 로마서를 연결하여 보면 너무나 분명하여 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하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그 비웃음과 조롱 속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신 일이 이삭입니다. 이것이 바로 없는데서 생긴 것이며 죽은 자 가운데 다시 받은 자가 됩니다. 이러한 약속의 계통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내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그 구원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하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그 미련하고 어리석고 조롱 받은 십자가가 구원 받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복음이 증거 됩니다. 이 십자가로 완성된 복음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