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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11 예루살렘 입성    2016. 12. 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1)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지난주 설교제목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아리아가 있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39번 베드로의 아리아 제목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베드로가 부른다고 생각하면 테너나 베이스로 부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알토로 부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통곡하면서 부르기에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통곡의 기도였기에 알토가 적절했다고 제 나름의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가사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용서하여 달라고, 심히 통곡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오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노래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따라갔다면 어떤 사도가 되어 목양을 했을까요? 복음이 아니라 율법의 선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서 고난을 받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사도가 되었다면 주의 긍휼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런 자는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긍휼의 나라인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 힘으로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양을 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휘두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니다.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데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기도한 것입니까? 네가 그렇게 부인하여도 내가 너의 믿음의 떨어지지 않도록 붙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돌이키지도 못합니다. 여자들이 전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고기잡이 하려고 갔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주님은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어떻게 목양을 했는지 베드로 전 후서를 보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 맹인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손으로 만지시고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길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만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길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조차 말씀을 이루기 위한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이 시작되는 행정구역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이 감람산 자락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울며 피난 가던 곳이 감람산입니다(삼하15:30).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 시바가 나귀 두 마리를 보내어 다윗이 타고 입성하게 합니다(삼하16: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입성하시면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은 다윗 왕이 귀환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더 직접적인 인용구절은 스가랴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에서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을 것을 볼 것이니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합니다. 나귀 새끼는 어미를 따라 오기에 어미만 풀어오면 자연히 따라옵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즉시로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각주를 보면 나귀를 사용하고 나서 즉시 돌려보낼 것이라는 번역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라면 얼마든지 징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나귀를 풀어오게 하신 이유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말씀성취로 쓰임을 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에 그 주인은 나귀를 보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은 분명하게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옵니다. 여기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는 제목을 붙이면 연말에 좋은 설교제목이 됩니다.

 

지난주에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윤석전 목사 설교가 나와서 잠시 봤습니다. 10년 전에 창원의 상남교회 집회에 왔습니다. 하도 여러 말이 많은 사람이라서 어떤 사람인지 제가 혼자서 가 보았습니다. 예배당 2층에서 앉았는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면서 찬양 팀의 한 젊은 자매의 이름을 불러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큰 예배당 안을 걷게도 하고 멈추라고도 하고 뛰라고도 합니다. 그러자 이 자매가 정말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색함이나 쭈뼛 쭈뼛한 그런 모습이 없이 절대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도 연말이면 봉사를 잘 안하려고 않는지 한 알의 밀알로 섞어야 한다면서 헌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귀를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서 끌고 오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나귀를 기꺼이 제자들에게 내어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의 품꾼들이 열두 시간 일하나 한 시간 일하나 품삯이 같은 내용을 보면서 열두 시간 일한 사람이 화를 낸 것은 자신 놀고 있는 자임을 잊었던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열두 시간 일한 그 시간이 감사와 기쁨의 시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비교하다 보니 자신이 손해라는 느낌이 들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연말이 되어 봉사지원서를 받으면서 항상 느끼는 마음은 좀 씁쓸합니다. 물론 기쁨으로 기꺼이 자원하여 봉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17년을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제가 보기에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일에 묵묵히 잘 감당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불만을 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정말 몸이 약하여 못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런 시간이 큰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아십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짐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짐은 마땅히 자기가 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짐까지 서로 질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서 나그네 대접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천사를 대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신서도 나그네 대접에 대하여 종종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갈 때에 잘 접대하라고 바울사도가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접대를 하는 일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디오드레베 같은 자는 복음 전도자 접대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접대하고자 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봉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주께서 나귀를 풀어서 오라고 하신 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11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5절의 이 말씀은 성경 두 곳을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 각주를 보시면 이사야62:11절과 스가랴서 9:9절의 각주가 달려있습니다.

 

이사야 62:10~12절을 봅니다. “10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12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헵시바(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와 쁄라(결혼한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단락입니다. 시온의 딸들에게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런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스가랴 9:9~12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마태복음에서는 스갸랴 9:9절 한절만 인용하였지만 이어지는 말씀과 함께 봅니다. 유대인들은 한절만 말해도 스가랴서의 말씀을 기억하지만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이 재건되는 그런 시기에 등장한 선지자입니다. 이때는 유다의 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온 곧 예루살렘의 딸이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부르는 이유는 그들의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고 오신다고 합니다. 그 왕이 오셔서 구원을 하시는데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다고 합니다. 고대의 왕이 전쟁을 하려면 말과 병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을 끊어버리는 평화의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백마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이유는 11절에서 언약의 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호산나로 찬송을 하는 무리들로 인하여 환영을 받습니다만 곧 이 군중들이 삼일 만에 돌변을 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를 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몰아붙이면서 빌라도에게 로마를 반역하는 자라고 하여 사형을 언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의 땅에 왕으로 입성하셨지만 결국 그들에 의하여 배척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도 구약에서 이미 예언이 되었고 스가랴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스가랴 12: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에 주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그 찌른 바 1)그를 바라보고 애통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를 앞에 각주 1)을 보시면 나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찌른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찔렀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찔러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을 찔러 죽인 자임을 알고 장자를 위하여 애통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이미 십년 전에 설교한 내용들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2007년도 스가랴 설교를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6~9절을 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그러자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폅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잘 때에 이불도 되지만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겉옷은 율법을 기억하기 위하여 술을 달아 입고 다니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겉옷을 함부로 길에 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길에 편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발아래 있다는 표시입니다.

 

열왕기하 9:13절에 보시면 엘리야가 사환을 보내어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선지자의 사환이 돌아간 후에 다른 장군들과 무리들이 예후의 말을 듣고서 급히 자기의 옷을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길에 깐 것은 이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예루살렘으로 행진을 합니다. 그렇게 행진하면서 찬송하는 내용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환호성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간구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 칭호임을 두 맹인이 부르짖을 때 본 말씀입니다. 이렇게 호산나 찬송은 유대인들 전통에서는 유월절에서 초막절 사이에 부른다고 합니다.

 

시편 118:22~26절입니다.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지금 무리들이 호산나 찬송을 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찬송의 내용이 시편 11825~2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십니다. 이 분에게 구원하여 달라고 기뻐하며 찬송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를 모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메시아를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수건이 가려지면 바로 앞에 있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면서 입성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마태는 스가랴 9:9절 한절만 인용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섬기는 왕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온 성이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무리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출신을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성 안의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송하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제자들도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자신들이 한 자리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하였을 것입니다. 나귀 새끼 타셨지만 이미 스가랴의 말씀대로 왕의 행진이 되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겉옷을 예수님의 앞길에 깔아 드림으로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무리들이 기뻐 환호하며 가는 것과 달리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도 샬롬의 성읍 곧 평화의 성읍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이 평화에 대한 소식을 모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을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전쟁의 무기를 끊어내시는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오는 그런 왕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면서 함께 가는 무리들도 예루살렘 사람들도 맹인입니다. 그들의 눈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루살렘, 평화의 성읍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멸망할 것이 예수님의 눈에 보입니다. 로마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의 아이들이 땅에 메어쳐질 것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환호하는 무리와 우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성도는 세상의 환호에 울음이 나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15:5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예레미야 15장의 말씀은 몇 주 전에 오후시간에 본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기에 지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가 멸망합니다. 이렇게 멸망할 때에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며 너를 위하여 울 자가 누구며 네 평안을 물을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예레미야가 울었습니다. 멸망한 유다지만 여호와의 언약대로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그렇게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약 400년이 지났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우십니다. 그리고 평안을 묻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남은 자들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그 분이 이방에도 평화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 평화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유대인과 이방인도 원수가 되었고 이웃끼리도 원수가 된 우리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우시면서 입성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같은 피로 구속받은 아들 안에도 평화가 일어납니다.

 

누가복음 19:37~38절입니다.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우시면서 들어가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부분적입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이 역사를 마감하시면서 영원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