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1~6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 2017. 3. 5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마태복음 23장에는 예수님께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시는 말씀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곳저곳에서 하신 말씀들로 나타나는데, 마태는 이러한 말씀을 한곳에 집중하여 모아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들어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와 제자들도 반드시 들어야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앉은 자리 곧 모세의 자리에 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무리들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입니다. 이 무리 안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리도 제자들이라고 따로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나타났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무엇인지를 율법을 통하여 돌아본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는 모세 오경과 선지 서에도 나옵니다. 그 중에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는다는 말씀만 좋아하지만 신명기 28장에는 복의 내용은 저주의 내용에 비하면 삼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려고 해도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으로 율법의 저주를 따라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이렇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자기반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이유를 율법에서 찾아보니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고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여호와의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리새파입니다. 이들은 일상생활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율법을 지킴으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인간 편에서 확보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파에 들어가려면 일정기간의 시험기간을 거친 후에 십일조와 정결규례를 아주 엄격하게 지키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의 선생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의자가 고라신이라는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이 되었는데 돌로 만들어져있고 양 쪽에는 팔걸이가 있습니다. 여러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히브리어로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이스마엘의 아들 요단, 이 회당의 건물을 위하여 그가 자신의 재산을 드림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의 공로를 이렇게 남기고 싶어 한 모양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의자에 앉는 다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존경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먼저 봅니다.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결과가 이렇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으로 받고 살려고 하면 계속하여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땅에 오셨을 때에 로마의 식민지배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세의 의자가 앉은 자들이 온갖 율법의 규례와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키라고 하고 있으니 무거운 짐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무거운 짐이란 율법의 규례와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키는 짐들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사람들에게 짐만 지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면 마음의 쉼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습니다. 이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완성을 믿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됩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는 자에게 이런 쉼이 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해석이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의 본문에서만도 화 있을 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일곱 번이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은 듣고 지키지만 그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으로 가르치는 것도 그들의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것도 듣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산상수훈에서 보았습니다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을 예수님은 부인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고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해석들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3절은 두 번째 구절에 강조점이 있으며, 앞부분은 반어적이고 비꼬는 식의 치장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너희가 원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해도 좋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아서는 안 된다그런데 이런 해석도 모호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의 말 중에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을 거절하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식의 말을 합니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취할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을 버리면 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곳에서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진리도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하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리를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의 취사선택의 기준은 나에게 이익이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진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면 3절의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알고 전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전하였다면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2주 전에 마태복음 22:34~40절을 통하여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본문의 병행구절에서 어떤 서기관이 성경의 핵심강령을 잘 말한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32~34절입니다.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예수님은 이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핵심 내용을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20절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도 이미 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말은 듣고 지키라고 합니다. 그 율법의 말씀이나 선지자의 말씀들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일점일획이 천지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다 지켜 행하여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각색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개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바르게 율법을 전한다면 그 말씀을 듣고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다 지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면서 살아온 자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 외식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자들의 책망은 마태복음 23장에 가득합니다. 그러한 외식하는 자들 외에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고 한 그러한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의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이 답변은 잠시 뒤로 미루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봅니다.

 

본문 5~7절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는 것입니다. 경문 띠라는 것은 율법을 적은 작은 양피지를 작은 상자에 담아 이마나 팔에 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신명기 6:8절에서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적용하여 이마나 팔에 율법의 상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이 경문을 넓게 함으로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옷 술은 율법을 기억나게 하라고 붙이게 하였는데(15:38,39) 이것을 길게 함으로 자신들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과시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명예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귀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일로 존경을 받으려면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기에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과시함으로 존경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2:38~40절입니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로 행세하지만 과부가 이들을 믿고 재산을 위탁하면 그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 이들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인 경건을 자기들의 이익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조금 전에 미루어둔 내용을 말씀드립니다. 어떤 서기관은 지혜롭게 성경의 핵심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율법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란 백퍼센트 완벽하게 지키면 의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죄하고 심판하는 기능이지 구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흠이 없이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17~24절입니다.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을 바울사도가 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며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율법을 받아서 가르친다는 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극힌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고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라고 어리석은 자의 교사라고 믿고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라고 하지만 그들의 속은 도둑질과 간음과 우상숭배로 가득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런 말을 하지만 자기 자신도 바리새인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열심인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3:6).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의 열심을 낸 결과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는 일을 한 것입니다. 교회를 진멸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유대인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율법의 마침이며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 나타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이 아닌 율법의 의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현실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오늘날은 목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전하기보다 자신들의 야망을 위하여 성경의 온갖 구절들을 끌어다가 비전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썩지 아니할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이 될 만한 것들을 이루어내자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메시지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이 아니라 이것저것을 하자는 율법조문과 같은 것들을 적용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강단이 모세의 자리가 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복음이 선포되는지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모든 이단들이 다 율법주의라는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말하고 언약을 말해도 특정 교단이나 특정 교회나 특정 인물을 통하여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이단입니다. 그들의 정점에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모든 성경 해석은 그 사람이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곧 법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신천지가 이렇고 다른 모든 이단들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곳에서도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있습니다. 특정인의 설교가 성경보다 우위에 있게 되면 그런 곳이 바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고린도후서 3:6~11절입니다.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전합니다. 말은 복음이라고 해도 동일하게 율법 조문처럼 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은 복음이라고 해도 마치 율법의 조문처럼 전하면 그런 자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정죄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죄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며,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왜 인간은 율법의 조문을 지켜서 의에 이를 수 없는지를 알게 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른 율법 해석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기에 담대하게 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바울사도는 정죄의 직분인 율법의 전하는 자도 영광이 있기에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채가 점점 사라져간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한계와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사라져 가는 광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바울사도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으면 결코 영원한 영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하신 새 언약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그 모세의 수건이 가려진 자들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12~18절입니다.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때도 말은 복음이라고 하였지만 그 내용과 형태는 율법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마음을 가리고 있으면 이런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끊임없이 율법의 조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고 주님께 맡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관리를 해야 하기에 계속하여 법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조문이 되기에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지만 영은 살린다고 할 때에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그 영을 넘겨받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설교의 내용이 모세의 자리에서 나오는 율법의 조문인지, 영으로 말미암은 진리로 자유하게 하는 복음인지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라면 구별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모세의 수건이 벗겨지고, 십자가로 나타난 주의 영광이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