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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3 물위로 오라 하소서 2016. 6. 5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3)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22절을 봅니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자기가 무리를 보낸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하십니다. 재촉이란 강요하다는 강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강요하여 무리와 분리시켜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면 성인남자만 5천명이나 되는 무리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산으로 피하여 가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도 마음이 설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속셈들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한 자리 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재촉하여 그런 군중과 멀어지게 배타고 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따로 산에 가십니다. 저녁이 깊어졌는데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44,45). 그러므로 오늘 사건을 통하여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17:3).

 

24~26절입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수리를 떠났다는 것은 바다 가운데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은 밤 사경입니다. 밤 사경이란 유대 식으로 밤 10시경입니다. 한 밤중에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예수님께서 산에서 다 보고 계십니다(6:48).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시는데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라서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이 바다 위를 걸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바다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혼동과 무질서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종종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바다의 괴물을 용, 리워야단, 악어 등으로 표현을 합니다(27:1, 51:9). 이러한 바다를 예수님은 발로 밟고 오시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고 합니다.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니라고 하는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내가 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빛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출애굽기 3:14절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름을 물은 장면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기는 하겠지만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냐고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느냐고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 문자로 하면 거룩한 네 글자라고 해서 발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 글자에 주라는 단어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로 호칭을 합니다만 유대인들은 여호와라고 하지 않고 주라는 합니다.

 

출애굽기 3:14~15절입니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1)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1)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4절의 1)로 되어있는 부분의 각주를 보시면 히브리어로 나는 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 여기서 나는 나다는 뜻의 여호와에고 에이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 이 이름의 뜻을 해석한 내용이 15절입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그 하나님이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스스로 있다는 말씀은 홀로 자존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 분이 약속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다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예수가 그분의 일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니 안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말이지만 이 뜻이 담겨 있습니다.

 

2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서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합니다. 물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아직 베드로는 제대로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기에 바다 위를 걸어오셨으니 정말 주님의 능력이라면 저도 물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는데 제자들을 두려워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놀라면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 하는고 하였습니다. 이러함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당신이 바다를 잔잔케 하신 그 분이시라면 나를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고 물 위로 걸어가는 것이 누구의 능력입니까? 베드로의 능력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입니까? 예수님께서 오라하신 그 말씀의 능력입니다. 어떤 목사는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믿음이며 바다 위를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강조점이 사람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신앙생활 곧 믿음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믿고 살지 누가 예수님을 믿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물 위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30절입니다. 베드로가 몇 발자국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갑니다. 바람이 불어 풍랑이 이는 바다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몇 발자국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철썩 거리는 그 현실을 보고서 무서워하는 순간 물에 빠져 들어갑니다.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면서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칩니다. 이 상황을 본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31절입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풍랑 이는 바다에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을 때에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 하면서 놀라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시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사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일을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가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였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31절의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의 말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이 작다는 말도 있고 믿음이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믿음을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상이 크다고 하면 작은 상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상이 크다 작다. 믿음이 크다 작다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양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크다 또는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떨 때에 사용합니까? 교회 일을 누가 더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크고 적음을 측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작다는 말은 불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합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이라는 말입니다.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분이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물 위로 걸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신 그 말씀의 능력이 물 위를 걷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작고 크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물 위로 걷는 믿음생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6: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하여 염려하는 자들과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는 자들은 이방인들 곧 믿음이 없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이방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6:8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나중에 본문에서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오병이어의 기적만이 아니라 떡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성인 남자 사천 명이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떡 가져가기를 잊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인데 제자들은 떡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보고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작다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이 작은 것 곧 불신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5:28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여인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그런 여인입니다. 이 본문을 볼 때 자세히 보겠습니다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안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옳다고 하면서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크고 작음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는 것이 믿음이 큰 자 곧 믿음이 있는 자이며 그 반대로 자신도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이 믿음이 작은 자 곧 믿음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진 자들은 물 위를 걷는 자들과 같습니다. 물위를 걷는 베드로를 보고 베드로의 믿음이 좋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가는가?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물 위로 걸어가는 구나!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물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율법적인 행위나. 신비적인 체험이나, 금욕적이 행위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세상이라는 물속에 빠져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어떻게 선물로 주어지는지 구약의 세 곳을 통하여 말씀을 보겠습니다.

 

첫째는 노아 홍수입니다. 온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합니다. 이렇게 악한 모습은 사람들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결혼하는 모습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노아방주를 예비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었다는 말이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에베소서 2:8절의 말씀이 모든 믿음이 사람들에게 다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에 탐으로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을 때 물위에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자신들의 기쁨과 쾌락을 위하여 살 때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길입니다. 말세의 고통당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노아의 때가 그러하였고, 소돔과 고모라의 때도 그러하였고, 이천 년 전에도 그러하였고, 오늘날도 말세에 고 통 당하는 때입니다. 이런 말세를 맞은 세상에서 베드로처럼 물 위로 오라고 하소서! 이 요청을 하는 것은 나는 세상에 함몰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이것이 믿음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우리 모두가 이런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아갑니다. 이런 곳에서 베드로가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 라고 한 것처럼 이런 곳에 함몰되지 않게 하소서! 이런 자리에서 돌아서게 하여 주소서! 그렇게 요청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출애굽 때입니다.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애굽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여 바다로 들어섰다가 바닷물에 빠져 다 죽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어린 양의 피의 능력은 홍해 바다를 가르고 그 바다 가운데로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어린 양의 피 아래 있지 않는 애굽 군대는 동일한 그 바다에서 빠져 죽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사건을 세례로 말합니다(고전 10:1,2). 구름과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나온 자들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찬양이 홍해바다를 건넌 후에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요한 계시록에서 모세의 노래가 어린 양의 노래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5:1~3절입니다.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이미 오신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셨고 사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물속에 빠져 들어가면 다 심판이며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물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임한 생명이 주어진 자만이 물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온 생명이 없는 자들은 세상, 곧 물속에 속하여 살아도 답답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 백성들에게는 출애굽이 일어나며 홍해를 건너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건넌 자들이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는 내용과 겹쳐집니다.

 

요한 계시록 18장은 바벨론이 멸망하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은 온 세상을 다 말합니다. 이 바벨론이 어떻게 멸망하게 됩니까? 8:21절입니다.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큰 성 바벨론이 바다에 던져지는 맷돌처럼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바벨론이라는 세상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18: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여기서 빠져 나오는 것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세상 위를 걷는 자들입니다.

 

세 번째로 요단강입니다. 마지막으로 건널 요단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넌다는 찬송은 장례식 때 부릅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물에 들어서자 범람하여 흐르던 요단강이 벽처럼 쌓이고 그 물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궤 앞을 지나서 요단강을 건넙니다. 출애굽과 다시 겹쳐집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의 인생행로가 됩니다.

 

다시 본문을 생각해 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만약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나도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해 주시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걸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물 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바다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소리 질러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속에서 건져 달라고 하십니까? 멸망할 세상에서 건져 달라고 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멸망할 세상에서 건져달라고 믿는 자들이 참으로 귀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멸망할 세상에서 빠져나와 그 위를 밟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물 위로 걷는 것과 같은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12:1~2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물로 심판 받는 세상에서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에 탔습니다. 홍해를 하나님의 약속과 어린 양의 피로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다라는 세상에 빠지는 자들이 아니라 그 바다를 건너 모세의 노래 곧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오늘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