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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1~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2016. 6. 19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1)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1절을 봅니다. 봉독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이들이 왜 왔을까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도대체 예수가 누군지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산헤드린 공회가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기 전에는 이 산헤드린 공회가 율법을 어긴 자들에게 사형까지 언도하는 최고의 기관입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만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도 율법과 동등한 권위로 여깁니다. 때로는 율법보다 율법의 해석과 적용인 미쉬나를 더 중요한 실천목록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동금지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는 창조를 기억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십계명인데도 신명기 5장에서는 출애굽을 기억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조나 구원이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조문에 매여서 일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를 정하여 둔 것이 49가지의 부칙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칙 중에 하나만 어기면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됩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 예수님의 언행과 그의 제자들의 모습을 조사해 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2절입니다. “봉독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냐고 합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 것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것입니다. 율법에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고 먹으라는 구체적인 법은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제의적인 일을 하면서 손을 씻으라는 내용은 있습니다(30:18, 21:6). 그리고 레위기의 정결규례에서 부정한 것과 접촉하였을 때에 온 몸을 씻으라는 규례들은 많이 있습니다(15). 그러나 일반적인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으라는 율법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잘 지키게 하려고 외출을 하였다가 돌아오면 반드시 손발을 씻도록 규정을 정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추가하여 음식을 먹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고 먹도록 장로들의 전통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기에 예수님께 따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성경을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까? 역사와 전통을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까? 보수적인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보수적인 전통이 있습니다. 진보적인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진보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만나면 성경해석도 다르고 국가관도 다릅니다. 율법적인 교회를 다닌 사람과 은사중심의 교회를 다닌 사람이 만나도 다릅니다. 그런데 모두들 자기들의 전통이 옳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런 시간과 순서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오랜 세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서를 바꾸거나 빼거나 하면 난리가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6절입니다. 봉독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고(20:12, 5:16)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셨거늘(20:9) 너희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려서 유익하게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폐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제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만 하면 부모 공양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 고르반입니다. 이것을 고르반 사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만 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않습니다. 언제 드린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평생 자신의 소유로 여기며 살아가면서 부모는 공양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런 교묘한 모습들이 장로들의 전통으로 지켜지는데 여기에 아무도 의의를 걸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권위도 있지만 그런 전통들로 인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폐한다고 책망하십니다.

 

7~9절입니다. 봉독예수님께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란 속은 아닌데 겉으로만 꾸미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에 대하여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잘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 29:13절을 인용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수많은 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계명과 가르침이 전통이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입술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먼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6:29).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당장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행위가 어떤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전통들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척도라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십일조가 없다는 말을 듣고 전화가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십일조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구약의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교회 유지는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연보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과연 성경대로 하는지 사람의 유전과 전통을 따라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느라고 정작 하나님의 일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음 주에 볼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볼 때는 개같이 취급을 당하는 여인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먹는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옳다고 하면서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10~12절입니다. 봉독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는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의 전통을 따라 정죄하고 있는 그들의 말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와서 하는 말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느냐고 합니다.

 

13~14절입니다. “봉독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걸려 넘어지는 자는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서기관이며 율법의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언행으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이 아니기에 뽑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습니다. 왜 갔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싫어서 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복음이 걸림이 되어서 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결국 뽑혀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다 아버지께서 심으신 자들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가 맞을까요? 우리 모두 자기를 확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은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의 선생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가르치지만 그들이 맹인이라고 합니다.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는 그들을 그냥 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도 걸려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래?’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잘 설득하여 돌이키도록 해야지 걸려 넘어질 자는 걸려 넘어지도록 내 버려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자들은 다 뽑혀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을 따라가는 자들도 맹인이기에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29:9~12절입니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는 말씀을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 바로 앞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고 합니다. 그들이 비틀거림은 포도주로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어주셨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여호와의 율법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여러 가지 사람들의 계명과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제사장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의 배가 불러지는 것입니다. 온갖 절기지킴과 성전의 제물은 넘쳐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는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의 잇속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이사야 1:10~15절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킵니까? 잘 지키지 않습니까?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기에 힘을 씁니다. 제물은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 분향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하나님께서 질린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절기를 지키는 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관원이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식으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고 온갖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무수한 제물을 바치고 절기들을 지키는 이유는 그들이 더욱 악을 행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 시대의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과 상관이 없습니까? 오늘날도 이 땅의 교회들의 모습은 이사야 당시와 예수님 당시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슨 절기를 지키라고 하고 많은 헌신을 강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 식상하여져서 이곳까지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종교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을 들으니 정말 자유하고 감사하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 자유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는 종교성으로 신과 거래하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유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15~20절입니다. “봉독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설명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고 하시면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버려지는 것이기에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것이란 결국 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전통과 교훈과 규례로는 사람의 겉은 씻을 수 있지만 사람의 속은 씻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미풍양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문법이 있고 성문법이 있습니다. 양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도 사람의 속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친히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자들이 온갖 율법을 다 지켜서 스스로 의롭다고 할 정로도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라도 그들은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고 있는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왜 주신 것입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왜 인간의 행위로 인간의 속을 씻을 수 없는지 보여주십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 사도가 구약의 여러 곳을 인용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치우쳐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입만 열면 죽은 시체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즉 입으로 수많은 법들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속임을 일삼는 것이며 그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독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에도 소통이 아니라 강제하는 법으로 전달됩니다. 표현을 달리하더라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상대방을 강제하려는 의도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3:19~27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두기위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구약에서 알려주셨습니다. 모세 언약보다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언약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보여주신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은 어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것도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더러움을 가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행위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고 하는 것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아담과 하와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을 벗기시고 오직 어린 양의 피로 만들어진 의의 세마포 옷을 입는 것이 모든 사람의 더러움을 덮어주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완성 외에 또다시 여러 가지 규례들을 만들어 지키게 한다면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들이 사람들을 오히려 더럽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가 벌거벗겨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검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벌거벗겨지고 우리의 속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아는 자들은 자기가 만든 누더기를 걸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옷 입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의와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된다는 복음으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주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인간의 행위들과 평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타인들이 자신에 대하여 평가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도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는 것임을 압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은혜가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