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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21~28 네 믿음이 크도다! 2016. 6. 26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설교제목이 네 믿음이 크도다!’ 입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제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오늘도 큰 믿음을 가지라는 말을 하겠구나! 이런 예측을 하시는 분들은 믿음을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를 합니까? 모든 공적인 예배를 빠지지 않고, 모든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하는 분들도 간혹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믿음이 무언지를 몰라서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의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믿음을 자꾸만 나의 행위로 측정할 수 있는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다는 말씀을 드리니 큰 믿음교회가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곳에 가 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도 한다고 합니다. 제가 큰 믿음교회 글들 몇 편을 봤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엉터리라고 말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도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만한 내용들이 성경에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큰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을 하게 된 이유는 칼빈의 예정설을 믿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도 않는 자들이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있기에 그런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서 큰 믿음을 발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큰 믿음이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해서 큰 믿음이 아닙니다. 목사가 인정한다고 큰 믿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큰 믿음이라는 것들이 나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이런 것이 큰 믿음이 아닙니까? 다른 이름으로 한 것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엄청난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할만한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답니다. 이런 일들이 그 날에 일어날 것이기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그러면 큰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바닷가 이방인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셨을까요?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시비 거리를 찾기에 이곳으로 피신하여 갔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로 가신 것이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니듯이 두로와 시돈지역에 가신 것도 우연히 가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우물가로 예수님이 가셔서 죄 많은 한 여인과 말씀하시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참된 생명수가 무엇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에서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22절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옵니다. 가나안 여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인들을 경멸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7:26절을 보면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페니키아를 합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헬라인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헬라인 지역에서 이곳으로 와서 사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출생부터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칭호입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기다린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이방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이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요청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예수님께 요청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여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자기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23절입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말은 한 두 번 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단어를 보면 계속하여 그렇게 부르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청하여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그를 보내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고 소리를 지르니 어떻게 해결하여 달라고 합니다. 쫓아 보내시든지 아니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든지 어떻게 해 달라고 제자들이 요청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교회당에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이 생각이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서재를 노크하고 제가 문을 열어주도록 기다리는데 한 사람은 노크하고 바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옵니다. 아주 멀쩡한 사람이 당당하게 도와달라고 합니다. 제가 금요일 일찍 온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는데 그렇게 밀고 들어옵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도와주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찮아서 그냥 천원 줘서 돌려보냅니다. 그러면 나가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커피도 당당하게 자기 것처럼 빼서 들고 나갑니다. 이 사람은 어지간한 모독은 견디는 내공이 쌓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말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2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그 여인이 계속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그 부르짖음에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다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청원을 하자 그제야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말씀은 이미 앞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방인의 지역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가라고 하였습니다(10:5,6).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종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분명한 거절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와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간청을 합니다. 물론 이 여인은 지금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기에 고쳐주실 분이 예수님뿐이신 줄 알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라는 것을 소문을 들어서 확신을 하고 온 것입니다. 자신은 다윗의 자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이 여인이 참으로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도 없는 이런 믿음이 이방인에게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바로 믿음의 특성입니다.

 

26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그렇게 부르짖은 여인에게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그렇게 부르짖으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분명한 거절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주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정말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요청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존심을 위하여 목숨도 버립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꼴로 살기 싫다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이 한 해에 수백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고서 이 여인은 어떻게 응답합니까?

 

27~28절입니다.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아무리 자기 딸이 위중한 병에 걸려서 고통스럽다고 하여도 그렇지 이런 말까지 들으면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시면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큰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시며 주가 되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이방여인이라서 개와 같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이런 고백이 어떻게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향하여 믿음이 크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큰 믿음을 원하십니까? 우리는 큰 믿음을 원해도 이런 자존심 상하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내었다는 그런 믿음을 원합니다. 나의 자존심 세워주는 믿음의 업적,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내용도 성경의 믿음과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믿음이 나옵니까?

 

사무엘하 9:6~8절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사울의 집안사람들을 찾습니다. 그 이유는 요나단과 다윗이 언약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이 이런 자를 살려주면 반역의 무리들이 반역할 빌미가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으로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그 할아버지의 소유를 다 돌려주겠고 왕의 식탁에 참여하여 떡을 먹게 합니다. 왕자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므비보셋은 전쟁 중에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림으로 두 발이 다 접니다. 이런 자를 왕의 식탁에 참여시킬 때에 하는 말이 죽은 개와 같은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나를 돌보시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방 여인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때에 열방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열방이 받는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외에 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1차 대상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다른 나라도 혜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 이루심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도 그 언약의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5~13절입니다. “봉독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본 말씀이기에 간략하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행구절을 보면 자신이 감히 예수님께 나올 수가 없어서 유대인 친구들을 보내어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 집으로 가시려고 하시자 자신의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다만 말씀만 하여 주시면 된다고 합니다. 자기도 남의 수하에 있고 자기에게도 수하의 사람들이 있기에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는 말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일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 자손이라고 하는 자들은 이미 율법의 의가 있어서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오면 자기 같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큰 믿음 교회만이 아니라 그 교회를 비판하는 교회라고 하여도 무엇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까? 무엇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합니까? 세상의 힘이 되는 것들을 믿음이 좋은 척도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방인 백부장이나 므비보셋이나 가나안 여인과 같은 자들의 믿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그런 세상의 힘들을 믿음의 척도로 보려고 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믿음이 좋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면 이야 말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4:13~16절입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들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씨를 통하여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율법이 있기 430년 전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 상속을 받는 것이 율법에 속한 자들이 받는 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범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17~22절입니다.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이 자기의 율법적인 행위입니까? 은혜로 인한 믿음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나 가나안 여인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어떤 믿음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말을 하지만 내가 예수를 믿어주는 행위로 예수님과 거래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런 믿음의 행위를 할 테니, 나에게 구원도 주시고, 나에게 세상의 복도 주시고, 천국의 상급도 많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23~25절입니다. “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어 내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어 주심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죽으심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가나안 여인과 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가나안 여인은 개와 같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개 같은 자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고백을 한 이 여인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낮추어져야 이런 고백을 하겠습니까! 어느 정도로 마음이 가난해져야 주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의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고개를 돌이질 하는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는 자리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결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란 없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죽은 데서 살아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이 여인과 같은 고백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는 당신을 살해하였는데 당신은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로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믿음의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믿음이 큰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