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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4 최종 표적 2016. 7. 10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을 믿는 일에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이 믿는 일에 도움이 될까요? 아무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적이 일어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기적체험 간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간증들을 다 모으면 우리가 평생 간증만 들어도 다 못 들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간증들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런 간증들을 통하여 나도 그런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간증이 있습니까?

 

전에 한번 물고기 많은 잡은 장로의 간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간증에서 베드로가 물고기 많이 잡은 것처럼 정말 자기도 물고기를 많이 잡은 간증을 이야기하는데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많이 잡힌 기적을 통하여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 고백을 하였는데 한국에서 물고기 많이 잡아서 그것도 세 번이나 대박이 난 사람의 간증에서 베드로의 이 고백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기적이 주인공이 되라는 말이 결론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무엇이 진짜 기적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것이 기적입니다.

 

마태복음 12:38~42절을 봅니다. “봉독앞에서 본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전체를 지킬 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율법의 권위와 동등한 것으로 여기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한 그 표적들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다시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들이 상상한 메시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평소에 좋지 않은 관계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차이점은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지만 사두개인들을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나 정치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맞지 않는 자들이 함께 예수님을 공격하는 일에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왔습니다. 공공의 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시험합니다. 시험한다는 것을 올무에 걸기 위한 것입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표적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5:29~31절입니다.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7~31절입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도 바로 앞의 단락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습니다. 왜 비웃는가 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기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비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들의 속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자는 그야 말로 호화롭게 즐기며 살고 그 집 앞의 나사로는 헌데가 가득하여 개들이 핥고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런데 둘 다 죽어서 눈을 떠 보니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이며 부자는 음부에 있습니다.

 

부자가 간 곳은 불꽃 가운데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눈을 들어보니 거지 나사라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합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겨서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부자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가 자기 집 앞의 거지로 본 모양입니다. 이때 하는 말이 이곳과 그곳은 건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러면 자기 아버지의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이런 곳에 오지 말게 전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간다 하여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표적과 기적도 믿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시골에 농사를 짓거나 바닷가에 어업을 하는 사람들은 일기를 잘 예측합니다. 그처럼 유대인들도 오랜 경험으로 그 날의 징조를 통하여 날씨를 알아봅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는 그런 일기를 잘 분별하면서 어떻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가 없느냐고 하십니다.

 

시대의 표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하심을 보고서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조차 옥에 갇혔을 때에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서는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세례요한 자신이 성령의 지시로 성령이 임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요한이 기대한 메시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정도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그들 중심의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메시아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부국강병을 위하여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싸드를 수입하여 배치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기를 지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눈과 마음이 가려져 있기에 메시아를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책망을 구약부터 받은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다면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메시아 이거나 아니면 사두개인들이 원하는 메시아여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에세네파나 열심당원들의 편이라도 되었다면 한 편은 예수님 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 어떤 계파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대단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출발이 출애굽과 함께 일어납니다. 430년을 노예로 있다가 하나님의 언약과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에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모세의 말대로 애굽 사람들에게 은과 금과 패물과 의복을 구하자 애굽 사람들이 다 내어놓습니다. 이들의 물품을 취하여 출애굽을 합니다. 이들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다 빠져 죽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시내 산 앞에서 여호와와 언약을 체결합니다. 출애굽 한 목적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막을 만듭니다. 그 성막을 만들 때에 수많은 물품들이 애굽에서 받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나왔지만 애굽을 이기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임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여호와만이 대제국 애굽의 신들을 무너뜨렸다는 그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타락을 해도 그 선민의식은 남아 있습니다.

 

광야 40년을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사사시대를 지나 왕들의 시대에서 나라가 나누어집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합니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선민의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 제국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의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전국에 조서를 내릴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거대한 제국의 왕이 그들이 정복하였던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의 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자신과 자신의 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에스라 6:8~12절입니다. “8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9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10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11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12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일차로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성전의 기구들을 되찾아 오면서 고레스 왕이 특별조서로 성전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방해가 일어나자 다리오 왕을 통하여 다시 옛날 조서를 찾게 되고 다시 성전 재건을 하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왕과 왕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하면서 왕의 조서를 변개하여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을 헐면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예루살렘이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도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유대의 절기 때 마다 흩어진 유대인들만이 몰려와서 예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 나라에서도 예루살렘을 순행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보물들이 쌓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성전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들의 목을 더욱 곧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의 위용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삼일 만에 짓겠다고 합니다. 어찌 이런 예수를 살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역사와 전통과 자부심을 다 무너뜨리는 자가 예수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여도 예수만큼 모독하는 자가 없다고 본 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수많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예수님께 계속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한 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성경에 계시된 대로 표적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민의식에 대한 자부심을 충족시켜 주는 메시아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 그들에게 보여줄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이 표적에 대하여 말씀하셨기에 그들의 대답을 듣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믿고 있습니까? 요나의 표적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표적 외에 다른 표적을 원하지 않습니까? 부활도 십자가 안에 함유되기에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바울은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였더니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니 교회가 부흥하고 전국에서 배우려고 온다고 합니다. 춘천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간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간증이라는 것들이 사실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시시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의 제국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이기에 메시아가 오시면 대단한 일들을 이루어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주실 최종 표적이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저주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21:23). 말씀이 이러한데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가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제자들도 다 그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돌이질 하고 떠나간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을 하지 못하고 죽어간 그 저주 받은 죽음, 무능한 죽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부르짖는데도 끝끝내 외면하여 버리신 그 십자가의 죽음이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룬 것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그 영을 넘겨주시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아니면 단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며 역설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이 증거 하는 이 십자가의 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종의 표적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포함이 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십자가를 걸어 놓고 있지만 그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는 오늘날 교회당 꼭대기에 팔색조의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한탄을 합니다. 온갖 색깔의 네온사인이 십자가 형태로 나타나는데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색깔이 바뀌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기는 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표적으로 보여주신다는 표적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여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의 예수가 어떻게 구원자가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지혜를 찾는 헬라인 곧 이방인들은 십자가는 너무나 미련한 것입니다. 헤브라이즘은 표적이 있습니다. 여호와 유일신의 신앙이 있고 율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보는 십자가는 거리낄 뿐입니다. 헬레니즘은 지혜를 구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은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론만큼 어리석은 이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학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존의 많은 교회들이 번영신학과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를 전하니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곳을 찾는 사람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진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웃거리다가 이곳까지 흘러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학습한다고 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를 믿을 수 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전했기 때문에 구원 받게 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전도자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도끼나 톱 처럼 쓰임을 받은 존재가 전도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되었다고 해서 믿은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복음 전한 그 사람을 추종하면 복음 전한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복음을 전하면서 자기만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의도가 있었기에 그럴 것입니다. .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0~13절입니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린도 교회에 파당이 생길 때에 바울이 이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는 것입니다. 감히 인간들의 이름이 나오기에 십자가의 도를 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5~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부르심의 증거로 보이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우리교회는 법조인이 몇 명이며 의사와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들의 신이 배라는 것입니다. 배가 신이라는 것은 욕망의 그들의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기에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 자랑거리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아도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택하신 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종 표적이 십자가라는 말씀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더 이상 세상의 자랑거리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최종 표적인 십자가의 도를 듣고 믿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