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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24~28 예수님을 따르려면 2016. 8. 7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심으로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반석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님께 항변하면서 말립니다. 주님께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고 나설 때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도모하는 것은 사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중세의 철학자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중세시대는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종교체계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지구가 돈다고 하면 교회에서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중세시대에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자리까지가야 그것이 진리라고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다 의심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심을 하여도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의심할 수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명제가 나는 생각 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제가 성경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도 데카르트라는 사람의 명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도 진리의 최종 판단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나에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도 내가 좋은 자리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을 하였습니까? 모두들 자기중심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도 여러 종파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두가 본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진리의 척도가 된다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에 이것이 사람의 일이며 사탄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게 하는 가족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말합니다. 나의 전 존재가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한 말인데도 그것이 사탄의 말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 어느 정도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말씀은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그 생각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갔지만 왜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라는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긍정하기 위하여 따라간 것입니다. 배도 그물도 가족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하기 위하여 따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을 하려고 왔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갑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질문해 봅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모였습니까?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무더운 날에 모인 것입니까? 나를 위하여서 모인 것입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모였습니까? 자기를 긍정하기 위하여 모였습니까? 살기 위하여 모였습니까? 죽기 위하여 모였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절대 진리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를 헤치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자기를 방어합니다. 그래서 한문의 나 아()자가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신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헤치면 나도 너를 죽이겠다고 하는 자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신을 따르려고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순히 순종하면서 따라 가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척하겠습니까? 당연히 배척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결단을 하고 결심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이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결단과 결심과 의지로 순교를 했다고 하여도 이것은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이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공산 혁명을 위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노동법을 지키라고, 이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립니다. 이런 것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극단적인 자기긍정이며 자아의 확대입니다. 이것이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은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것도 내 목숨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니는 것입니다. 이 목숨을 생물학적인 목숨인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인지 구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물학적인 목숨이든지 영원한 생명이든지 그것이 나의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교회도 다니고 이것저것도 하라면 하겠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으로 나를 살리려고 하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사는 길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왜 따라갑니까? 죽기 위하여 따라갑니까? 살기 위하여 따라갑니까?

 

본문 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이 볼 때에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기에 그 뒤를 따르는 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십자가의 행렬 곧 죽음의 행렬로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보면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영광들을 지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서지만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죽음의 길로 가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릅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었다고 하여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은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에게 절하여 세상의 영광을 다 가지면 무엇을 합니까? 이 세상이 불에 타 사라질 때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지금 지구 전체가 폭염으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가 용암이 들끓고 있는 불덩어리 위에 있다는 생각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땅에 발 딛고 사는 곳을 지표라고 합니다. 지구를 사과로 비유하면 사과 껍질 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사과 껍질을 비집고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곳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가득합니다. 백두산에 가보니 그 높은 곳에서 노천 온천수가 김을 뿜으며 쏟아나고 있습니다.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 하면서 지구 소행성 충돌이라는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직경 5백 킬로 정도 되는 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시뮬레이션을 해 보니 지구의 바다 물이 순식간에 마르고 모든 나무가 사라지고 지구 전체가 불덩이가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땅에서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십니까?

 

본문 27절을 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각 사람들에게 행한 대로 갚아준다고 하십니다.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니 사람들은 천국의 상급차등을 노리면서 열심히 행한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기 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인지 예수님을 위한 것인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무엇을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부인되지 않고 행한 것이라면 결국 자기를 위하여 행한 것이기에 그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앞에서 이미 본 말씀입니다만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엄청난 일을 했지만 주님은 모르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과 연결하여 보면 자기부인이 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자기들이 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내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확인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입니다.

 

로마서 14:7~9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은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믿는 자라면 이제 나는 나를 위하여 살거나 죽거나 할 수가 없는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의 길로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까? 살아도 나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나를 위하여 죽지 않습니까? 화가 나서 죽겠다는 말을 하거나 탁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하였을 텐데 이런 우리가 언제 한번이라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살아도 죽어도 내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런데 여전히 나의 것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아직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이라면 결국 주의 것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맙니다. 어떻게 자기 백성을 자기 부인의 길로 만들어 가시는지 보겠습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과 연결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재림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난해 구절로 봅니다만 예수님은 부분으로 전체를 말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온 세상의 멸망과 겹쳐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왕권을 가지신 분으로 제자들이 보게 되는 사건은 언제입니까?

 

다음 주에 볼 마태복음 17장의 변화 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이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왕권을 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보고서도 결국은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왕권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순절 성령 임함으로 보기도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제자들이 담대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기에 예수님의 왕권이 제자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사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입니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후에 이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 권세는 인자되심과 십자가를 지심으로 받으신 권세입니다. 이 권세로 제자들에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권세는 이 역사가 다하는 그날까지 십자가로 증거가 되는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어떤 권세를 주신 것입니까? 세상의 영광을 받는 길이 아니라 세상에서 미움 받고 배척받는 길로 보냄을 받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분이 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봅니다.

 

마태복음 20:17~19절입니다.“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여기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죽으실 것과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이때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하려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자기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죽기 위하여가 아니라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갑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0:25~28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의 권세는 갑 질 하는 권세이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섬기는 권세이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는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왕권을 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지만 그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임함으로 제자들이 이제 예수님의 왕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역사가 마감되는 그날까지 증거 되어야 할 내용이며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왕권을 이루신 자리가 됨을 증거 하는 자들이 사도들이었습니다. 만약 십자가 없는 왕권을 이 지상에 나타내셨다면 그 순간 온 세상은 심판의 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행한 대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분리하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21절입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0절은 너무 잘 아는 구절이지만 그 배경을 봐야 합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들 앞에서 안 먹은 체 합니다. 이때 바울사도가 책망을 하면서 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데 그것은 율법은 헐어버린 것이 됩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을 세운다면 이것이 범법한 자가 된다고 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을 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육체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내가 살아서 내가 율법을 행하는 그 체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 믿음이란 나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다시 내가 살아있는 율법적인 행위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바울사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떻게 증거 하는가 하면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한번 그리스도와 영 단번에 죽은 자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은 날마다 죽는 것이며(고전 15:31)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면 도살당할 양처럼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8:36). 이것이 주를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을 하고 천국에서도 마일리지를 쌓는 식으로 전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에게만 이런 자기 부인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믿음의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인도하는 자들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잘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 기준은 이미 사도들이 성경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땅의 일과 땅의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욕망의 신을 섬기는 자들이기에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에게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또 한 주간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