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23~33 부활 때에는(1) 2017.1. 29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명절 잘 지냈습니까? 오늘 본문과 상관은 없지만 명절이라고 하니 성도의 명절이 무엇인지 잠시 보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7~8절입니다.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바울사도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누룩에 비유를 한 것입니다.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누룩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전에 누룩을 집안에서 제거합니다. 유월절과 연결되는 절기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무교절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다 이루신 후로는 절기나 누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묵은 누룩도 아니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도 아니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합니다. 묵은 누룩이란 율법적인 절기를 말하며 악의에 찬 누룩이란 육신의 방탕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순전하고 진실한 누룩 없는 떡으로 명절을 지킨다고 합니다. 이 떡은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는 자가 명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거하는 것이 성도의 명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세금 문제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 믿는 자들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부활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살아갑니다. 이들은 유력한 대제사장들과 세속의 귀족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습니다(23:6~8). 모세 오경의 문자적인 해석만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에 현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와 타협을 해서라도 유다의 정치적인 자유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부활이 없다는 것을 질문한 내용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신명기 25:5~6절입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모세의 이 율법이 있기도 전에 창세기 38장에서 유다는 자기 아들들을 계대(繼代)결혼을 시킵니다. 이러한 계대 결혼이 율법에 명시가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이 율법을 근거로 부활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면서 예를 들어 말합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면 그 아내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둘째와 셋째와 일곱째 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다면 일곱 명의 형제들이 다 한 아내를 취하였는데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은 자신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질문입니다.

 

29~3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에 오해하였다고 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생각을 해 보시적이 없습니까? 저도 어려서 부활하여 천국에서 사는 것이 이 세상의 가족관계의 연장인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부목사 때에 어른들 심방을 가서 물어보니 오래 교회 다닌 여 집사님인데 천국에서 자기 남편하고 다시 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전하였습니다만 지금 사두개인들은 천사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오경으로 부활을 증거 합니다.

 

31~33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기에 예수님은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출애굽기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들이 믿는다는 모세오경의 출애굽기의 이 말씀으로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에 호렙산에 양떼를 몰고 갔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는데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떨기나무란 광야의 덤불처럼 된 나무인데 불이 붙으면 금방 꺼져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서 모세가 이상히 여겨 그곳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신 후에 자신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부활에 관하여 하신 말씀입니까? 우리가 보기에도 이 말씀으로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뜻을 잘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 곧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 말씀의 뜻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이라고 하면 죽어서 다시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몸의 부활이 있지만 그런 부활이라는 것은 역시 나를 중심으로 나를 위한 부활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지금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과 상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6~10절입니다.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서 부르짖는 자들의 고통을 아시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내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 4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땅과 씨에 대한 약속을 창세기 12장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겨우 자신의 묘지와 그에 딸린 밭만 약속의 땅에서 마련하고 죽었습니다. 물론 약속의 씨는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님이 드러나고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고 죽은데서 살아나는 방식으로 이삭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이삭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를 언약하시고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야곱 때에 애굽에 내려와서 약 4백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11~15절입니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1)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1)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을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때 대답하신 말씀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계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이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70인 역이라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서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네 글자를 여호와로 후대에 읽지만 이 단어를 에고 에이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위로 걸어오실 때에 제자들이 놀라서 유령이라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나다라는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이름으로 언약하신 바를 예수님께서 친히 다 이루어내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본문 31~33절을 다시 봅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말씀으로 부활을 논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항상 계시는 분이신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역사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하신 분이 영원히 사신 분이시기에 그 약속 안에 있는 자는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비록 역사 속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하기에 그 약속 안에서 산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약 4백년이 지나서 이루어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실 때에 너의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돌아오리라고 하신 그 때가 되어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시키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고 약속의 땅에는 여호수아가 인도하여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사시대를 지나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다 차지하지 못합니다. 다윗 시대에 와서 그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약 천년이 되어서 이루어 내십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 약속이 살아있다는 것은 약속을 받은 그들도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땅이 약 천년이 지나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그 씨에 대한 약속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았습니다만 이삭은 그림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씨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갈라디아서 3:15~16절입니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4)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4)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4)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땅과 씨가 언제 이루어집니까? 땅은 천년 만에 다윗에게 이루어지고 그 씨에 대한 약속은 이천년 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다윗의 그 땅은 다시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린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을 회복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씨,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은 그 씨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날이 부활의 때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37~38절입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누가복음은 좀 더 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얻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그런 세상적인 일들이 아니라 천사와 동등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천사와 동등이라는 말이 신분적인 면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장가가고 시집가는 그런 차원이 아닌 영적인 차원의 세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합니다. 어떤 서기관이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들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물을 수가 없는 엄청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38절의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이고 죽어도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안의 백성은 살아도 죽어도 산자입니다.

 

그러면 언약 밖의 사람들은 마지막 부활의 때에 부활하지 않습니까? 이들도 부활은 합니다. 몸의 활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부활을 합니다. 그렇게 부활한 몸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활로 나오지만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4~29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금 다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 믿을 수가 없기에 이런 믿음이 바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는 것같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놀라운 복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든지 믿지 않는 자든지 이 역사 속에서는 다 죽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무덤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 곧 예수님의 생명이 담긴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담기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요한복음 11:23~27절입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일부러 가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지 4일이 되어서 나사로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잔다고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여 자면 깨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제자들과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오늘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사라가 죽은 지 4일이 지나서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마지막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모든 자가 다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에고 에이미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인 내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죽은 자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살아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7:1~5절입니다.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부활의 세계를 미리 맛본 것입니다. 엘리야는 제자들보다 약 팔백년 전의 사람이고 모세는 약 천사백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알아봅니다. 역사의 자리가 갑자기 묵시의 세계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세계가 부활의 세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어떻게 알아보았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이 사건을 비밀로 붙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사건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전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얼마나 좋았는지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곳이 좋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초막이 없어도 되고 세 분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할 정도로 그곳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내도 가정도 세상의 일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 영광가운데 거함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면 우리도 이 부활의 세계를 잠시나마 맛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곳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생각들은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는 중에도 우리가 예배 후에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이 지배하고 있다면 아직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영광의 날 부활의 때를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알고 믿는다면 지금 죽어도 좋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부활의 세계를 말씀가운데서 더욱 풍성하게 맛봄으로 그 부활의 때를 사모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