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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0~24 심판 날에 2016. 1. 1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장례식이나 결혼식을 놀이로 만들어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이 곡을 하면 한 편은 가슴을 치는 것이고 한 편이 피리를 불면 한 편은 춤을 추어야 놀이가 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주 금식하며 회개를 선포하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으로 천국잔치를 열고 계시는데 오히려 이것을 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욕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 맞지 않는 모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지혜가 주체가 되어 어떤 일을 행할 때에 그 행하는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행한 일로앞의 각주를 보면 자녀들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옳다고 하는 자들은 지혜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모든 일들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음 주에 볼 내용인 26절에 보시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께서 이루고 계시는데 그 내용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일을 무조건 옳다고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때에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5~6절입니다.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세례요한조차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의심할 정도로 사람들은 각자의 천국과 메시아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의 임함을 위의 말씀으로 하시면서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ㅂ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다시 이 말씀을 상고해 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을 예수님께서 이루고 계시는데 단순이 육체적인 장애를 고쳐주시는 것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맹인이 눈을 떠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 자가 진리를 아는 것이며, 못 걷는 자가 걷는 것은 진리의 길로 가지 못하던 자가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이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전적으로 부정한 것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그 부정함을 담당하셔야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못 듣는 자가 듣는 것은 진리를 듣지 못하던 자가 진리를 듣는 것이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신 것은 지금 이렇게 천국이 온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하십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하여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비교하는 고라신과 벳새다는 이스라엘 안의 지역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 밖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라신과 벳새다가 어떤 지역인지 두로와 시돈이 어떤 곳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듣는 자들은 고라신과 벳새다를 알고 두로와 시돈도 아는 자들입니다. 두로와 시돈에 대하여 구약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 23~24절을 봅니다. 가버나움과 소돔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 또한 이스라엘 안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소돔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로 심판을 받은 성읍입니다. 예수님은 소돔에서 가버나움에 행한 일을 하셨다면 그 소돔이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 교만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고 하지만 그러나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예수님 당시에 어떤 지역이며 그 지역의 특징들이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도 함께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심판 하시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이 자료는 히브리 적 관점으로 다시 보는 마태복음이라는 책에서 부분 인용합니다.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고라신은 갈릴리 북부지역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가버나움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와 시리아의 다마스커서를 연결하는 상업 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상업적으로 많이 발달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래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하지만 상업으로 인해 발달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풍족한 삶을 누렸기 때문에 일개 랍비가 베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벳새다는 요단 강 동편에 있던 어촌마을이었다. ’벳새다물고기 잡는 동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헬몬 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요단강을 따라 갈릴리 바다로 수많은 부유물들이 흘러 들어와서 많은 물고기들이 몰려드는 북쪽 입구 주변에 형성된 동네였다. 이 부근에는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잡는 동네가 형성되었고, 이 동네 출신의 어부들은 물고기를 많이 잡아 부를 축적해서 로마로부터 지속적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고 있었다. 고라신은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중간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동네이다. 미쉬나에 의하면 주변의 비탈진 경사면이 화산 석과 화산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곡식을 심어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먼저 익는 보리를 생산했다고 한다. 이 보리는 초실절 제물로 드려지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어떤 지역인지 조금 설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 지역은 농업과 어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비교적 다른 마을들 보다 잘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들이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이적과 표적들로는 부유한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은 것입니다. 정말로 가난하여 병을 치료받을 수도 없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치유의 이적이 정말 크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어지간한 병들은 의사를 통하여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행하시는 그런 권능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부자들이 더 멋있게 사는 법을 보여주면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을들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이 가버나움에 대한 책망의 말씀처럼 교만입니다.

 

이제는 두로와 시돈과 소돔에 대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왜 이런 내용들을 봐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천국복음 전하시는데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심판을 받은 두로와 시돈과 소돔을 보면 지금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시는 그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인지 구원을 받을 것인지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심판 받을 길로 가고 있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심판의 길로 가는지 구원의 길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사야 23:1~9절입니다. “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6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7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8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요한 나라였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서편의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이기에 무역으로 부요한 성읍이었으며 그런 부로 아주 견고한 성읍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성은 희락의 성이었으며 멀리까지 그 세력을 뻗치며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자들입니다. 그 상인들은 고관이며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부유하고 희락이 있고 고관이며 세상에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을 우리도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두로와 시돈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이렇게 부요해지면 거의 교만으로 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8:1~10절입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10 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두로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두로가 부요함으로 교만하여 심판 당한 것을 말씀함으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두로가 무역으로 부요하게 되니 하는 소리가 나는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근원적인 교만의 자리 곧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에 넘어간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면 부로서 교만하여집니다. 종교적인 업적들을 쌓게 되면 그것으로도 교만해 집니다. 지식으로도 교만해 집니다. 윤리와 도적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그것으로고 교만해집니다. 복음을 지식적으로 알면 그것도 교만해집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는 다 나는 신이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로의 교만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11~19절입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두로의 교만과 타락을 어디에서 타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에덴동산에서의 그 아름다운 상태에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모든 인류의 타락입니다. 그 타락의 근원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들이 그 에덴동산의 기억들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적 표현으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허리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죽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다 아담의 허리에 속한 자들로서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 먹은 자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스스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두로와 시돈의 모습으로 고라신과 벳새다과 가버나움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다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말씀하십니다. 천국을 보여주십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용서를 받고 천지를 지으신 그 하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이 너무나 못 마땅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저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면 자신들은 그런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쌓아온 그 율법적인 의라는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또한 두로와 시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부요하였던 고라신과 벳새대와 가버나움과 같은 곳도 예수님의 그런 천국은 싫은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그런 나라가 싫다는 것입니다. 나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드러나는 나라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에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하신 그런 권능을 보여주었다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대하여서는 가버나움에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돔은 왜 멸망했습니까? 창세기 13: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소돔과 고모라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다고 합니다. 물이 넉넉하여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농사가 잘 되고 부요하게 됨으로 인하여 타락한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동성연애의 어원인 소도미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1~42절입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낸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는데 요나를 보낸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도 솔로몬을 보내신 분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심판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 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지 그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됩니다. 주일학교 설교를 할 때에 재미있는 예화를 들면 조금이나마 듣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전하면 거저 시선이 돌아갑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질 때에 어떤 자세와 태도로 듣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잘 보지 못하지만 마주보는 저는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할 때에 여러분을 자세히 보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눈을 감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는 경우는 말씀에 반응을 보일 때입니다. 초점을 흐리거나 눈을 감는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데 졸거나 다른 짓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면 아예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는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라고 나왔더니 하는 말이 늘 예수, 십자가, 그런 이야기만 하고 오늘은 또 심판의 날에 대한 말을 합니다. 이런 내용이 정말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립니까? 벌써 17년을 들어서 지루하신 것입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번영신학을 쫓아 죽도록 헌신하였는데 오히려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수십 년 동안 추구하였는데 너무 공허하였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금욕적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정성을 바친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이것은 아닌데 이것은 정말 아닌데 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버리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 반대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그 말씀을 좀 전해 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 지기를 소원하십니까? 아니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심판 받을 것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시겠습니까? 두로와 시돈과 소돔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예수님을 말씀을 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심판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온 세상의 심판의 기준으로 이미 세워졌다는 말씀입니다. 그 마지막 심판의 기준 한 곳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진리의 지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어신 그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자기 아들에게 돌리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그 진리의 복음을 버리는 것은 다시 속죄가 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는 심판의 불만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거운 것인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기준도 확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언약의 피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성령이 임한 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