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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9~14 참된 안식       2016. 2. 7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지난주에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신지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인 안식 안에 들어가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참된 완성의 자리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안식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안식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항상 나를 중심으로 봅니다. 나의 구원, 나의 안식, 나의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자리에 들어갈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 하나님의 안식 곧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도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지신 그 영광을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영광 곧 그 아들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들이 각자가 자신이 주인인줄 착각해서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1~5절입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을 통하여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십니다. 이것이 아들의 영화로움이며 이 일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영화로움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진 영화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불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영생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들도 모두 부활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는 지금 이 역사 속에서도 영생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부분적으로 맛을 보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완전한 영생을 누릴 그 날을 소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영생에 들어가는 것도 우리의 영광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24~26절입니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전체만 제대로 읽고 받아들여진다면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영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십니다. 물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이 관계는 성령으로 됩니다. 이 관계 속에 우리도 포함시켜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도 그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 한 그 영광스러운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도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자리에서 떠나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인간의 질문 속에 정말 몰라서 묻는 질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 아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또는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한 질문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를 고발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인간의 악함이라는 것이 이 질문 하나에도 다 들어있습니다.

 

11~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시는데 그들의 안식일에 행하는 일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는데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안식일에 짐승이나 사람이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 여러 가지 해석들이 또 있습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구덩이에 빠졌다면 먹이만 주고 그 다음날 건져내야 한다고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쪽 손이 마른 사람이라면 급한 질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안식일에 꼭 고쳐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짐승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우리에서 풀어 물을 먹이는 일을 그들이 행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4~16절입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열여덟 해를 귀신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예수님을 책망합니다. 엿새 동안에 고침을 받을 것인데 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자기 짐승들을 아껴서 안식일에 물을 먹이는데 열여덟 해를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씀 후에 반대자들이 부끄러워하고 다른 무리는 환영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평소에 자신들의 짐승을 아껴서 안식일이지만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입니다. 이 정도의 일은 안식일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이 평소에 안식일에 행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되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 어떤 누구도 반대논리를 펴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그 사람에게 손을 내 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중풍이 왔는지 손이 마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이시기에 그 손에 펴진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한 자들은 안식일 논쟁의 논리에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 나음을 보았다면 예수님께 항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지를 의논합니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외식한 것입니다. 겉으로만 안식일을 지켰지 참된 안식이 이들에게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을 자기 의를 삼고 남을 정죄하기 바빴습니다. 이런 안식으로는 결코 참된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것은 창조와 구원이 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라고 주셨지만 이들의 마음과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 긍휼로 베풀고 계시는 안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논리적인 설득력으로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상대방과 논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 사람보다 압도적인 지식과 논리로 이긴다고 하여도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세상의 지식으로도 성경의 내용으로도 무지한 상태가 드러나고 이제 항복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쟁이들이 말은 잘한다고 하면서 물러서지 그 복음의 내용에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평소에 율법이라는 의를 가지고 사는 이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와 말씀을 보고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어기는 자로 보였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의 주인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림자로 지키게 한 그 안식일을 지킨다는 자들이 안식일의 주인을 실제로 죽여 버렸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조건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의 완성은 이러한 사탄의 세력들도 완전히 결박하여 영원한 무저갱에 던져버리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7~12절입니다.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3)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공간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일이 하늘이라는 묵시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에서 쫓겨 난 용이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사탄이라고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그 옛 뱀입니다. 그러면 이미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 패배한 마귀 사탄이 쫓겨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 뜻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천지 창조의 목적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이 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자리입니다. 용 곧 옛 뱀, 마귀, 사탄을 이기신 자리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영광으로 보이지만 이 역사가 마감되는 그 날에는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온 우주적인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7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노아 홍수 때 왜 세상이 멸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정욕을 따라 행하는 것은 이 세상은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것은 말씀으로 해체하실 수 도 있고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세상에 몰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전부로 여기고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전부인줄 아는 그 세상을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동일한 말씀으로 이 땅을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경건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불살라집니까?

 

요한계시록 20:7~10절입니다. “7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천년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때입니다. 그 약속의 때를 초림과 재림으로 전에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 확대하면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 세상의 심판까지를 천년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 약속의 때가 차면 사탄 마귀 짐승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데 그곳에서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안식이 없는 곳입니다.

 

천지 창조 시에 안식에 대한 말씀의 결론이 이렇게 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이 세상 속에서 평안히 살고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생명에서 끊어진 인생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안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우리는 이 역사를 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온갖 지식을 다 동원하여 물질문명을 발달시킨다고 하지만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을 통하여 인문학과 자연 과학이 발달하고 동력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이루어낸 결과가 모두를 잘 살게 한 것이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대량 학살무기가 개발되어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세계 전쟁을 통하여서 인간은 그 어떤 희망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안이 없기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평화와 안식을 추구하지만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3:8~18절입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1)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에 태워져 사라진다고 합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새 언약으로 만들어진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 앞에서 점도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쉴 곳을 찾은 자들만이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그 안식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그 안식을 부분적으로 맛을 보는 자만 사모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4:1~3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안식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일들이 이미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천지창조가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있고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복음을 받았지만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는데 그것을 오직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 안식을 만들어 내거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셔야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런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모든 안식일에 노동하지 않음이 가장 중요한 안식일 지키는 법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안식을 주심으로 그 안식을 맛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안식을 맛 본 자들은 세상의 근심과 염려에서도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더욱 완전하고 영원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성도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 때부터 이루어진 그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이라면 이 세상의 환난과 풍파를 통하여 더욱 그 안식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로이며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