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14~28 언약의 피 2017. 9. 10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1)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1~13절까지 세 번에 걸쳐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유월절에 못 박히심, 유월절 어린 양. 내 장례를 위하여,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최후의 만찬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말씀하신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최후의 만찬의 배경이 가룟 유다의 배신과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넘겨준다는 말은 팔아넘긴다는 말입니다. 은 삼십에 넘겨지는 내용은 마태복음 27장에서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때 보도록 하고 오늘은 유다의 배신만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팔릴 것을 이미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17:22, 20:18, 26:2). 26:2절을 다시 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월절에 팔리실 것만 아니라 누구에게 팔리실 것도 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어떤 자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비하여 향유 옥합 삼백 데나리온을 예수님께서 부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것을 허비한다고 하면서 구제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가룟 유다가 도적이라고 합니다(12:6). 이 말씀을 보면 돈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은 삼심은 노예의 몸 값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후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 그 돈을 성전에 던지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도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4절입니다. “1)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각주를 보면 가나나인이란 열심당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심 당원이 시몬인데 가룟 유다도 또 다른 열심당원으로 봅니다. 가룟이라는 어원을 추적하여 시카리오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단도를 품고 다니는 자객으로 봅니다. 어떤 학자는 이런 자들은 로마 당국의 눈을 피하여 대제사장들과 거래도 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당시에 대제사장과 만나서 거래를 할 정도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으로 봐도 됩니다. 그리고 가장 능력이 있었기에 돈궤를 맡아서 재정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유다가 왜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 삼년을 다녔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무력으로라도 로마를 둘러엎고 유다의 독립을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메시아인줄 알고 삼년이나 예수를 따라 다녔는데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다는 이야기만 하는 예수를 더 이상 메시아로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다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넘겨주었다고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6:64,70,71절입니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가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을 전하자 제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명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많고 예수님을 팔아버릴 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열둘을 내가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하십니다. 누구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택하심 안에 마귀의 역할을 할 자도 택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배신할 자를 알고 택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성경을 이루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1~25절입니다.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그때에 유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다들 주여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하는데 유다는 랍비라고 부르면서 자기는 아니지요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미 말하였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은 삼십을 받았기에 자신이 팔자임을 알면서 나는 아니지요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 안에 이런 거짓됨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자인지를 모릅니다.

 

요한복음 13:18~19절입니다.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여기서도 최후의 만찬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너희가 다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 것이라는 성경이 응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아직 누가 예수님을 배반 할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미리 말씀하여 두시는 이유는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 인줄 알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3:21~30절을 보면 누가 예수님을 팔자인지 베드로가 요한에게 눈짓으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요한이 주님께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찍어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면서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줍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네 할 일을 하라는 말씀이 유다가 돈궤를 맡았기에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고 하는지 아니면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가지 곧 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놀라운 말씀입니다.

 

31~32절입니다.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배신하여 팔리시는 것이 어떻게 영광을 받은 것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됩니까? 예수님께서 배신을 당하시고 팔리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말씀의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18절입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이 말씀은 시편 41: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시편입니다. 다윗이 함께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다윗이 배신당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배신당함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유다의 자유 의지로 배신하였다거나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를 강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나는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아니지요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와 제자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이 말씀에 혹시 반발이 일어난다면 아직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기에 반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9:10~18절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아멘이 되신다면 모든 성경이 아멘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는 자는 자기의 주체성이 무너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되는 자만이 이런 일이 믿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의 의미를 알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믿는 자들입니다. 일 년에 한 두 번 하는 의식적인 성찬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된다고 여기는 자들이 주의 몸 된 교회이며 성전입니다.

 

본문 17~20절입니다. 무교절 첫날이 유월절입니다.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예수님은 성안의 누구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키신 대로 유월절이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들의 거처를 무상으로 제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위하여 앉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나를 팔자가 있다는 말씀에 깜짝 놀라서 질문하는 내용은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그 배경 하에서 유월절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26~29절입니다. 그들이 떡을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십니다. 유월절 만찬의 식사 예법이 있습니다. 쓴 나물을 먹고 떡을 떼면서 포도주도 네 번에 걸쳐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떡을 떼어 주시면서 자신의 몸이라고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유월절 만찬을 출애굽 이후로 약 천 오백년을 지킨다고 지켜온 민족입니다. 물론 중간에 제대로 지키지 못한 적이 많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율법을 잘 지키려는 운동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유월절에 먹는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한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시고 감사기도 후에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유월절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언약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는 언약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실 것을 영원 전에 언약하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영원 전에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셔서 혈과 육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혈과 육에 속한 우리가 일평생 죽음의 종노릇 하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기 위하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오신 것입니다(4:4). 은 삼십은 노에의 몸값입니다.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신의 살과 피로 의와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하여 죄의 노예인 우리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노예의 몸값에 팔리신 것입니다. 그 팔리시는 배경으로 유월절 떡과 잔을 나누면서 자신의 몸인 살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금요일 성경공부 하면서 찾아본 세 곳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피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라는 말씀의 해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보면 신명기 법에 의하여 분명한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 믿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그 저주가 바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 받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히브리서 2:14~17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내신 일을 세 곳의 말씀만 보았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저주를 자신이 저주 받으심으로 속량하셨습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평생에 죽음을 무서워하여 죽음에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죽음을 죽여 버린 죽음이기에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그 새 언약의 내용을 5백 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설교한 내용을 차재승 교수의 7인의 십자가 사상에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죽음에 내어주고 그의 피를 우리를 위해 흘리셨다는 메시지가 어디서 선포되든 간에, 이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와 믿어지고 유지되는 곳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 ...이 말씀은 어떤 보충도 필요 없다. 행위를 위한 어떤 자리도 없다.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의 피는 나의 행위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두 문장을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보려 한다. 나 자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내 구원을 위하여 추가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 ...어떻게 이 구 개의 문장이 서로 조화될 수가 있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루터의 다른 설교를 더 추가합니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 사이에는 어떤 빈틈도 없다. 그들은 서로 충돌할 뿐이다. 심지어 루터는 이보다 더 나아간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다면 우리 자신의 지혜, 행위, 의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죄를 두 번 짓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행위가 최선에 이를 때도 심지어 그것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든 지혜와 의와 능력을 가지고도 마귀의 왕국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개혁교단들마다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무엇으로 개혁을 하였는지 근원적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이러한 근본적인 내용들이 아주 기본이라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현대 개혁교회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십자가에서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린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통과 의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자체로부터 흘러 넘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은 다함이 없는 복음의 풍성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고 믿어지고 유지되는 곳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