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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3~27 어떠한 사람이기에! 2015. 9. 13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 소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불에 살려져 연기같이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어떤 것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가고 황금보석 꾸민 집에서 고통도 죽음도 없이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꾸는 사후의 세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황금보석으로 꾸민 새 예루살렘이 건물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아 나온 자들이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것저것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는 자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도 다 죽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영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도 우리와 같은 죽음을 죽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단지 영원히 산다는 개념의 영생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20:30~31절입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목적만이 아니라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도 없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본 마태복음 8:21~22절을 다시 봅니다.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이 세상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관혼상제(冠婚喪祭)입니다. 성인식, 혼인식, 초상, 제사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죽은 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 아무리 대단한 정성을 바치고 사람들에게 보암직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자꾸 분리시키십니다. 왜 따라오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다고 합니다. 왜 배에 오르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를 보시고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인자가 되신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다고 하자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8~10절입니다.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였는데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복음은 굿 뉴스인데 왜 복음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입니까?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듣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데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한 내용대로 하면 인간성의 말살입니다.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게 만듭니다. 또한 이러한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복음이라고 하면서 생명도 아닌 것과 썩을 것을 추구한다면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실 때에 자꾸 분리시키십니다. 그래서 배타고 건너가라고 합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풍랑 이는 바다의 배 위에서 주무십니다. 평행구절이 마가복음 4:38절을 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예수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고 합니다. 고물이란 배의 뒷부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배의 고물을 베개 삼아 베고 누우신 것으로 번역합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인자가 머리 두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지금 풍랑이 이는 바다 위의 그 배가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두렵습니다.

 

본문 25~27절입니다.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예수님은 풍랑이시는 바다 위에서 평안히 주무시는데 제자들을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우리를 구원 소서 우리가 죽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면서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랍게 여기며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났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알아보았습니다. 마태복음 7:28~29절입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것은 그 가르치심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자기들의 스승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권위는 모세보다 더 높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권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서 우리가 살펴 본대로 세 가지 치유사건입니다. 산상 수훈을 마치시고 최초로 나병환자를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라고 하셨을 때에 즉시로 깨끗해 졌습니다. 이러한 권위와 권세가 사람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시면서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감히 나아오지도 못하고 말씀만 하시면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뿐 아니라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친히 배에 타고 계시는데도 제자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서 평안히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두려워 죽겠다고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작다는 책망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는 책망입니다. 말씀으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는 책망입니다. 그렇게 책망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곧 잔잔하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이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 하면서 놀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작다는 책망과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앞에서 본 말씀입니다만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농사하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왜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이 작다고 하는 책망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생활의 염려란 곧 내일의 염려로 인한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염려에 사로잡혀 살면 결국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물을 믿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4:28~33절입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 말씀도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지 않고 제자들만 건너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 때 예수님께 바다 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일 주님이시라면 자신에게도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니 물에 빠져가니 주님께 구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물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사는 지로 늘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16:8절에서는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하신 내용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누룩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히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누룩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을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똑 같은 설교를 들어도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른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떡을 염려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작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7:20절에서는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시는 것을 보시고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내일의 염려로 두려워합니다. 풍랑 이는 배와 같은 이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즉시로 잔잔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즉시로 바다가 잔잔해 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분은 구약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고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이 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지신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오병이어의 기적과 병자의 고침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그런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능력이 나타나면 예수님을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과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표적과 능력들이 나타나면 더 큰 표적과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게 됩니다. 사람의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능력으로 나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최종 표적 유일한 표적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구약에서 증거 된 그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찾아본 시편 104편을 다시 봅니다.

 

시편 104:1~9절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7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8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천지창조와 노아 홍수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물속에 잠겨있는 혼동의 땅을 물과 뭍으로 나누십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때에 물이 산들을 다 덮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이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감으로 다시 땅과 바다의 경계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물을 꾸짖으신다는 표현이 지금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시며 물을 꾸짖어 물리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0723~31절입니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구약의 더 많은 곳에서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그 분이 누구신지 놀랐습니다. 그런데도 그 예수님을 아지 제대로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늘 의심하여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을 갑니다. 아무리 표적을 보여주고 기적을 보여주어도 그런 것으로 예수님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였으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요나의 표적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인간 지성으로 침 뱉고 돌아설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최종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만 말하고 왜 부활을 말하지 않느냐고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로 만족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말씀드리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도들이 증거 한 내용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을 사도들에게 보내시지 그들이 증거 한 내용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종 선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부와 권세들입니까? 그런 것들은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아무른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면 흔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흔들리고 내가 믿는다고 생각한 것도 다 흔들려야합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에 정말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다 들통이 나게 됩니다. 믿음의 대상도 아닌 것들을 믿는다고 한 것들이 무엇인지 죽을 정도로 흔들려 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믿는 다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시는데 우리는 흔들려 사라질 것들이 흔들린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주님을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5~29절입니다.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도대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을 이 땅에서 대언한 자가 모세였습니다. 그 모세의 경고를 거역한 자들이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내신 그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 때는 시내산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땅만 아니라 하늘까지 진동될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어 버리시는 이유는 흔들리지 아니할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흔들리는 배에서 두려워할 때에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흔들리지 아니할 기업 그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시기 위하여 흔들릴 모든 것들을 흔들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흔들릴 때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흔들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