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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8 죄 사하는 권세 2015. 10. 4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나서 마태복음 8장부터 이어지는 말씀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8장부터 기록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하여 봅니다. 산상수훈 후에 제일 먼저 고쳐주신 병자가 나병환자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하여 율법을 지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그 말씀 앞에서 전적인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전적인 죄인으로 드러날 때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게 됩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면 예수님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고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가능성이 1 퍼센트라도 있다면 그 있는 것만큼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두 번째는 백부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십니다. 백부장의 이런 믿음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대한 말씀이 나올 때에 모든 믿음이 왜 은혜의 선물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와 병자를 데리고 오시자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사역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실 때에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일들을 이미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이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과 밖이 이렇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세상으로 보이고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 안을 보면 죽은 자들로 보입니다.

 

따르려고 하는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배를 타고 건너가십니다. 이때 풍랑이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배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두려워서 죽겠다고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적다는 책망은 예수님이 그 배에 타고 계시는데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책망입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물결이 아주 잔잔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냐며 놀랍니다. 8장에서 연속되는 사건들을 보고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데 제자들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유대인이라고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도 받지 못한 이방인이라도 주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자들에게 믿음이 나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말씀으로 꾸짖어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셔서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는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그 귀신의 떼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서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가서 바다에 빠져 몰살합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인데도 그들은 그 생명의 주를 생존에 방해되는 사람으로 여기고 떠나가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고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곧 마귀 사탄 옛 뱀이라고 하는 대적의 권세아래 갇혀 있는 모습입니다. 어두움만 가득한 곳에 빛이 오니 어두움이 빛을 몰아내어 버렸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을 환영하시겠습니까? 배척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행복이나 만족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찾아오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발 내 인생에서 떠나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사사기에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갔다가 언약궤 앞에서 죽임당하고 언약궤를 빼앗겨 버립니다. 언약궤를 주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가 블레셋 성읍에서 재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다른 성읍으로 보내니 그곳에서도 재앙이 일어납니다. 마치 폭탄 돌리듯이 언약궤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가 본 동네 가버나움에 이르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신 것입니까?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떠나 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는 이유는 자기들의 필요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의 소원이 성취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마태복음 8장부터 살펴본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고 떠나 달라고 하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2절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옵니다.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2잘에서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붕을 뜯고 침상채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이 핵심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치유과정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과 이 사람을 데리고 온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분임을 믿고 왔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에서 믿음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거저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믿음 만능주의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면서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나의 욕망을 위한 믿음이라면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썩어지고 불태워 사라질 것들을 얻기 위하여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이 세상의 신에 의하여 조작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이 믿음이 과연 누구의 믿음이냐는 것을 찾아봐야 합니다.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조건 제공이 아니라 은혜로 인하여 나온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선물입니다.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이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이 믿음이 나의 소원이나 욕망을 이루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은 반드시 자기가 부인되고 이 믿음을 주신 분이 일하셨음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것도 은혜의 선물입니다.

 

고린도전서 4: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로 인하여 자랑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사도는 너희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우리가 받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흔히 말하는 일반은총도 다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가을 들판에 벼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모든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도 햇볕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공기와 물과 기후를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전부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는 특별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들은 구원의 은총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다 과분한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사도행전 3: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구걸하던 사람은 돈을 얻고자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자 이 사람이 곧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사도들을 주목하자 사도들이 왜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이 사람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면서 이 사람이 완전히 낫게 된 것은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완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에 그 구걸하던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누구로부터 나온 믿음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선물입니다.

 

다시 본문 2절을 봅니다. 그들의 믿음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그들이라고 하니 중풍병자나 이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가면 병을 고침 받을 것이라는 믿음조차도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마태복음 8장부터 우리가 보고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이 자연스럽게 아멘이 됩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하셔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먼저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지금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몇 달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확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병 고침 받는 것과 죄 사함을 받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을 걱정하는 절대빈곤의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 되는 것과 죄 사함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결혼, 취업, 사회적인 성공, 자존심 세워지는 것 등과 죄 사함을 받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 사함보다 다른 것이 마음을 두고 있다면 아직 죄가 무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기를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서기관들에게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로 인하여 질병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누구의 죄냐고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조상의 죄냐 자기 죄냐고 물을 정도로 질병은 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그 사람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은 죄의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보잘 것 없는 사람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의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알게 되는 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서기관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해석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 불가능합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서기관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오직 은혜의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둘 다 불가능합니다.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여 침상에 들려온 자를 어떻게 말 한마디로 일어나 걸어가라고 해서 걸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말씀이기에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다고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과 그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6절입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한다고 하십니다. 인자란 예수님이 자신을 호칭할 때 쓰는 말씀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다니엘서를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인자가 나옵니다. 항상 계신 이와 인자에 대하여 수요일 저녁 설교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오늘 인자에 대한 말씀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서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리도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침 받고 죄 사함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믿으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믿으려고 한다고 믿어지고 안 믿으려고 한다고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의 일들은 믿고 싶다고 생각하면 믿을 수도 있고 나는 믿지 않겠다고 하면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이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자기를 세뇌시키는 것입니다. 정말 은혜로 받은 믿음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죄 사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음으로 대단한 일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간증들이라는 것을 보면 믿음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 믿음의 내용들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썩어질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과연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무엇이 필요한 것들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도 이 역사 속에서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중에 병 고침만으로 끝난 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17:11~19절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서 와서 감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아홉은 무엇에만 관심이 있었습니까? 자기 몸 낳은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문둥병이 들었을 때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문둥병이 낫자 유대인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율법의 세계 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평소에 개로 보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사마이라 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병 고침만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이십니다. 그 권세는 예수님의 인자됨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전권을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향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이루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근거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모든 복음서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전체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시는 모든 일들은 십자가로 해석하여야 마땅합니다. 병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들도 결국은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왜 십자가의 영광이 영원한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자기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인자가 되심으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라는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신 것입니다. 그 죄 사함의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얻은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요한복음 5:20~29절입니다.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오늘 설교의 결론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인자됨으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심판의 권세만이 아니라 아들이 원하는 자를 살려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게 된다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는 때가 곧 이때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의 힘을 믿고 자기의 착함을 믿고 자기의 의를 붙들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나 구하고 있다면 그 부활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의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과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이 기쁨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모독과 죽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사랑, 자신이 죽기까지 한 이 사랑에서 끊어낼 것이 없습니다. 그의 피로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보여주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