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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9~13 긍휼을 배우라 2015. 10. 11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권세보다 다른 권세를 가지신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이 좋습니까? 죄만 사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좋습니까?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도 좋지만 내가 원하는 이것저것도 주시면 좋겠습니까? 우리의 이런 마음을 종교전문가들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시지 못한다고 하는 구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6절입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이 말씀 한 구절을 잃어놓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시지만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가 이 좋은 것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무엇으로 말하고 좋은 것을 무엇으로 말합니까? 단골로 등장하는 죄의 목록은 주일성수와 십일조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안하다가 망한 사람이 이것을 제대로 하여 엄청난 세상의 복을 받은 간증들을 몇 개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열심히 주일성수도하고 십일조도 안한 것까지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나 간에 그들의 좋은 것은 땅의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앞뒤의 내용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다는 책망입니다. 단지 한 두 가지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번창하고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습니다. 이 당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입니다. “30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을 하고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그것을 좋게 여깁니다. 세상의 회사나 어떤 조직들이 당근과 채찍으로 다루듯이 교회라는 곳도 축복과 저주를 휘두르면 사람들이 그런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은 어찌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종교적인 거래를 배격한다고 합니다. 기복적이거나 신비주의나 금욕주의를 배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하기에 결코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저녁에 신구장로님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해석은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취향이라는 말을 종종합니다. 우리의 취미가 각각 다르듯이 신앙의 칼라도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그 성령을 부어주시면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되는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주의 긍휼이 무엇인지 알고 배우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긍휼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마태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은 많이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직업을 그 자리에서 버려두고 예수님을 바로 따라나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지난주에 보신 대로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은 내 침상을 들고 일어가라고 하시니 즉석에서 일어나 침상을 메고 간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 마태가 주님을 따라 나서게 된 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여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명이며 빛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여 따라 나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15: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르실까요?

 

데살로니가 후서 2:13~14절입니다.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으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과 함께 연결해 봐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4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성도는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된 자들입니다. 언제 미리 아신 것입니까? 창세전에(1:3) 영원 전에(딤후1: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아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성령이 거룩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구별하여 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그 아신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구별하여 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하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도 연결되는 긍휼을 입은 자가 됩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어 거듭난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거듭 낫습니까? 거듭난 증거는 우리의 관심사와 소망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 곧 하늘에 간직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러합니까?

 

본문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자 마태가 즉석에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태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한 것입니다. 마태는 이제 가족들과 자기 친구들을 불러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태가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로 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의 12제자 이름이 나오지만 그냥 마태로 기록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만 마태라는 이름 앞에 세리를 붙이고 있습니다. 세리라는 것은 이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죄인 취급받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로마에 할당된 세금을 바치고 나면 더 많이 거둔 것은 자기들 것이 되기 때문에 세리는 언제나 죄인들과 동류로 취급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세리 마태라고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본문 10~12절을 다시 봅니다. 마태의 집에 식사를 하시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때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아 따지며 묻습니다.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쓸데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저도 병원심방 갈 때에 이 말씀을 전합니다. 복음 전하기 아주 적절한 예화가 되기도 합니다.

 

병이 있으니 의사에게 왔습니다만 당신의 죄는 누가 치료할 수가 있습니까? 병은 우리가 인지할 수도 있고 치료될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우리가 인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누가 알고 믿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나의 죄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의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그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거기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 모두까지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뜻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본문 13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이라는 각주를 보시면 호세아 6:6절이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서는 인애라고 합니다. 인애와 긍휼이 같은 단어입니다. 인애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 용례로 사람들 사이에 인자함, 친절함, 은혜, 자비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건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례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은총, 자비, 호의, 인애, 긍휼, 성실, 불쌍히 여김 등으로 사용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호세아 6:6절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배우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제사와 번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니 구약에서 제사와 번제를 얼마나 자주 상세하게 말씀하시는데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사와 번제를 통하여 그 뜻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를 통하여 정결한 짐승이 대신 희생당하는 그 의미를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와 용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양을 몇 마리 바쳤고 소를 몇 마리 바쳤으며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바쳤는가를 자기들의 의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제사와 번제를 통하여 긍휼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다 종교적인 자기 의 쌓기가 됩니다.

 

호세아 6:1~3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에 신실하심으로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 빛 같이 어김이 없다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태양을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새벽빛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언약에 신실(信實)하시고 성실(誠實)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남편이신 여호와는 참으로 남편의 의무를 다하는 신실하신 남편이신데 아내인 이스라엘은 얼마나 바람을 피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6:4~11절입니다.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이스라엘과 결혼한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그렇게 신실하신데 그 아내인 이스라엘은 음행을 합니다. 그래서 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같고 쉬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믿습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강대국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음행입니다. 북 이스라엘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입니다. 신랑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신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신실한 사랑을 하십니다. 이것이 인애이며 긍휼입니다.

 

호세아 2:14~18절입니다.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이 말씀에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날마다 바람피우는 자기 신부를 얼마나 열심히 찾아내시는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짝하여 죽음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아오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찾아내시면 그제야 여호와를 향하여 내 남편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고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평안히 눕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19~23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날마다 바람을 피우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장가들어 영원히 사신다고 합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륜이 됩니다. 음행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을 자신의 공의와 정의를 시행하시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과 함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이 합쳐질 수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아내가 남편과의 언약을 버리고 날마다 바람을 피웁니다. 언약의 조문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공의와 정의가 훼손되지 않고 은총과 긍휼이 나타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은총과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이 죄 가운데 갇혀있음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릅니다. 오히려 율법으로 자기들의 의로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이렇게 나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율법의 취지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비난 하는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자신들이 전적인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긍휼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로 이렇게 모여 있지만 나는 정말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십니까?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십니까? 내가 주님의 긍휼을 받는 자라면 나보다 더 죄인은 없어 보여야 합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알량한 자기 의라는 기준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갑니까? 이러한 자들이 정말 주의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얼마나 정죄와 판단을 일삼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이곳이 천국입니다. 그분의 긍휼로 죄인을 만왕의 왕의 식탁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다윗과 므비보셋을 통하여 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닐 때에 다윗이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에 주께 맡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어떻게 표현 합니까? 죽은 개와 벼룩(삼상24:14) 같은 자기를 쫒느냐는 말을 합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서 왕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으로 베풀어진 긍휼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가 되시는 왕의 식탁에 초대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식탁에 앉은 우리의 자세가 어떻습니까? 정말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나는 이 식탁에 참여될 수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나의 의는 전혀 없는 자라서 오직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분의 식탁에 참여하게 됨을 정말로 시인하십니까?

 

로마서 11:32절입니다.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불순종 아래 갇혀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구원이란 오직 주의 긍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 2:23절의 말씀이면서 또한 호세아 6:6절의 말씀입니다. 긍휼을 입지 못하던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그 자리는 긍휼이 시행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긍휼을 입지 못한 자들은 오히려 그것으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입었습니까?

 

디모데전서 1:12~17절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지난주에 서울에 있는 분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노량진교회 원로목사가 올해 90세인데 설교시간에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하나님 앞에 할 말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고 하였답니다. 15절을 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긍휼을 입은 사도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