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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4~1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15. 10. 18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사상은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의 청중들은 이 말씀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로 들립니다. 그들은 포도를 따서 발로 으깨어 즙을 내어 가죽으로 된 부대에 담습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발효가 시작되기에 가죽 부대가 낡아서 굳어져 있는 것이라면 발효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여 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유대인들이 구약의 성경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실천하며 살아오는 그들의 모든 내용과 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산상수훈에서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너희들의 조상들로부터 오는 그러한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 살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권세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을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율법의 뜻과 의미까지 다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율법과 그들의 전통으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금식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내용과 일부 겹쳐지지만 오늘은 그러한 금식이나 모든 절기들조차 새로운 부대에 담아져야 함을 보겠습니다.

 

우선 지난주의 말씀을 잠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고 그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힐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긍휼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그 모습을 보고 알량한 자신들의 의를 가지고 예수님까지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된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껏 맛보며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식탁에 참여되는 자세를 구약에서 봅니다.

 

사무엘하 9:6~8절입니다.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찾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 앉게 합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두려워합니다. 자기 할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따라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절하면서 이 종이 무엇이기에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느냐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이 여인은 주님께 옳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고서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왕의 식탁에 참여한 자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천국의 잔치를 이 땅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의 잔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 때에이 말은 바로 앞의 내용을 받는 말입니다. 물론 한 단락을 끝내고 다른 단락을 시작할 때에 앞의 사건과 상관없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본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금식일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금식일은 율법에서 딱 하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 속죄일에 온 백성이 몸을 괴롭게 하라고 합니다. 몸을 괴롭게 하라는 것을 금식으로 봅니다. 그 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한 날이 있을 때에 금식을 명하기도 합니다만 율법에서 정한 금식은 대 속죄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금식에 대한 내용은 어떤 날이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이미 목 베임을 당한 후이지만 아직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죽었다면 이제 세례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을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한 그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모든 일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계시는 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례 요한에게 속한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금식을 하고 있기에 예수님께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유대인들은 대 속죄일에 금식하는 내용 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유대인들이 스스로 금식할 날을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아직까지 금식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스가랴 7:3~6절입니다.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한 이유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달랴가 암살 당한 것을 기억하면서 금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두 번의 금식이 더 있습니다. 스가랴 8: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여기에 넷째 달과 열째 달이 추가 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날과 예루살렘이 포위된 날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금식 일을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지켜야 되느냐 아니냐고 물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은 그러한 금식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냐 너희를 위한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런 금식은 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합니다. 금식조차도 자기들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예수님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이 전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제가 해석하기를 예수님을 첫째로 모셔서 그 덕분에 둘째로 자신이 높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한 그 분도 그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만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전부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금식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그러므로 금식조차도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하는 자들입니다.

 

스가랴서 7장과 8장을 보시면 금식의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포로시대에 해왔던 그런 금식 일을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런 금식은 너희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에 평안히 거할 때에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진실한 재판을 하고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스가랴 7:9~14절입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계속 포로시기에 금식한 것을 지켜야 하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결론적인 답변입니다. 너희가 행한 그런 금식은 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금식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진실한 재판과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고 하셨는데 이런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라는 것으로 너희가 마땅히 할 일을 때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이 자기 좋으라고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엉터리 같은 금식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이사야서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8:1~7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1"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2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3 주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4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날 이 땅에 일어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종교적인 활동을 합니다. 규례를 지킵니다. 여호와의 뜻을 알기를 사모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런데 목적이 여호와를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원성취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규례를 행할 뿐만이 아니라 금식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금식을 해도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자 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이러한 야곱의 죄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들추어냅니다. 그러한 금식이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하는 금식이냐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 곧 스가랴서에서 말한 인애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참된 금식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참된 금식을 이스라엘백성들이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셔서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스가랴 8:19~20절입니다.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20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스가랴서에서 금식에 대한 질문 후에 금식이 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거짓된 금식과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8장의 말씀은 그러한 금식의 날이 기쁨과 즐거움이 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오직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때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의 날을 이사야 선지자나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한 날이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예수님은 식사하시면서 그들을 묶고 있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계시는 참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 14절을 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아직 구약의 전통 속에서 금식 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금식의 날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이 대 속죄일이든 아니면 스가랴서에 나온 그 금식일이든 아니면 또 다른 전통의 금식이든 그들을 종종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어떻게 슬퍼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으실 때를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근심하며 금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잠깐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어주시면 제자들은 다시 기쁨의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참으로 금식을 해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하게 보이면 금식할 때입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면 금식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금식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참된 금식을 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참된 금식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금식의 날이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되리라는 그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이루내고 계시는 자리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그 자리가 참된 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종노릇하고 있는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 의하여 정죄 당하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고 있는 자리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참된 금식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을 보고서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자들이 아직 옛 언약의 틀 안에 갇혀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전통으로 예수님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식을 완성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오히려 자신들의 율법적인 해석과 전통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두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참된 금식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고 있는 현장입니다. 아무리 금식을 해도 자기들의 죄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 잡혀간 것입니다. 그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나라가 망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을 하였지만 그런 금식도 자기를 위한 금식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이란 긍휼과 자비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고리대금으로 자기 백성들을 착취합니다. 수요일 저녁에 본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다시 가나안 원주민들과 결혼을 합니다. 이 일에 방백과 고관들이 더욱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임을 아주 정확하고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나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저기에 계신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규례를 행한다고 하는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이사야서와 스가랴를 통하여 금식에 대한 문제만 살펴보아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 순전히 자기를 위하여 금식을 하였지 참된 금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도 온갖 기도가 다 나옵니다. 기도의 방법론과 기도응답의 비결을 말합니다. 릴레이 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강청기도, 중보기도, 서원기도를 말합니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하는 것인지 그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라는 포장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스가랴 선지자의 책망처럼 과연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고 하신 그 말씀에 비추어 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기를 기도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내가 세상이 말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받아서 세상에서 폼 나게 사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우리의 모든 가치관과 이해와 생각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배우고 익힌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금요일 공부하면서 말씀드린 예레미야 1:10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모든 것들이 다 옛 부대가 되어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한 부대라도 벌써 굳어져 딱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부대, 나의 생각과 경험과 판단과 지향성과 가치관들이라는 부대가 오늘도 말씀으로 뽑히고 파괴되고 파멸되고 넘어뜨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하며 심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과거의 이력과 경력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결코 마일리지 쌓아서 상 받는 곳이 아닙니다. 날마다 무너져 내리고 날마다 죽는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는 상태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44~48절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의 뜻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풀어주십니다.

 

히브리서 9:13~15절입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모든 제사와 규례와 의식들은 모두 다 새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성하신 새 언약으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위하여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과 지혜와 거룩함과 구원이 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십자가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