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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15 거저 받은 것 2015. 11. 15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1)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오늘 교회들마다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곳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미국이 추수감사를 잘 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사람들의 유전이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무엇을 다 이루심인지 그 말씀부터 찾아보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12~17절입니다.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불리하게 하는 율법의 법조문을 지우고 제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나 안식일이라는 것은 장차 오실 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후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시 율법의 조문을 지키려고 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드는 것이기에 이런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항상 지켜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3:1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봅시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입니까? 열둘이라는 숫자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백성 열두 지파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열두 아들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야곱의 두 아내와 두 첩 사이에 얼마나 심한 시기와 질투로 태어나는 자식들인지 모릅니다. 이런 자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지 이들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열두 아들들이 애굽에 갔다가 430년 만에 한 민족이 되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합니다. 출애굽 한 자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으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언약은 신실하셔서 그 망한 자리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명맥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가 회복되고 율법을 지키고 있지만 이러한 나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개한 세례요한도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 때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 열둘을 부르신 것은 이제 예수님께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열둘로 보여주십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보시면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십니다. 여기서 권능에 대한 말씀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런 권능을 받아서 행하여야 한다는 자들이 오늘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권능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을 고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데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저도 이런 권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심방을 갈 때에 특히 환자심방일 경우에 기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만 저는 항상 전적인 무능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권능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35:4~6절입니다.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이루고 계심을 제자들을 통하여서도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권능을 행한 것은 자기를 보낸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이런 능력으로 보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믿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권능을 행하셨지만 이 혜택을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능력이 권능이 결코 아닙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12:39).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증거 되는 표적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16~17절의 말씀들을 보아도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말씀하십니다. 양을 이리가운데 보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공회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 한다고 합니다. 이러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참된 권능입니다(고전4:10~16).

 

본문 2~4절입니다. 열두 제자의 이름들과 그 출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두 제자들을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이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자로 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마태를 세리라고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을 당당하게 세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의 권능입니다. 나는 과거 세리였다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넘치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는 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데 왜 이런 자를 부르신 것입니까? 어떤 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어떤 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묻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다는 것 자체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냐고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런 질문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질문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서게 되면 수요일 저녁에 본 말씀처럼 다니엘이나 사도요한조차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고 썩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면 입을 닫게 될 것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방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왜 이방인에게도 사마리아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일차적인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체가 지금 잃어버린 양의 상태입니다. 지난주에 본 9:36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로 돌이키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이 목자 잃은 양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37~38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암탉이 병아리를 자기 품에 모으듯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지자들을 돌로 친 것입니다. 이제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가 오셔서 제자들을 보내시는데도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긍휼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긍휼의 대상이 되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들의 의로 인하여 예수님의 초청을 버립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자기들이 이루어내었다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의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자임을 아는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가 잃어버린 양들인데 그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율법을 완성하신 메시아를 바라보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 당당하게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모든 아담의 후손들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자존심 덩어리들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한 자들이 바로 율법의 행위로 자기의 의로 삼은 자들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참으로 잃어버린 양은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 이들에게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방금 로마서 10장의 말씀대로 자기 의를 가진 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평생 쌓아온 율법의 공로를 무시하느냐는 것입니다. 나처럼 율법을 흠 없이 지킨 자들이 가는 나라가 천국이어야 하는데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 값없이 들어가는 그런 천국은 싫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는 말씀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5~8절을 봅니다. 열둘을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한 것입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국복음을 전하는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권능을 행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능을 행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능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권능은 예수님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이제 보내심을 받습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 위하여 가는데 아무 것도 가지고 가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 여행을 떠나는데 아무 것도 없이 떠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제자들인 가는 곳 마다 병을 고쳐주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시면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하여 쩔쩔 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는 모습이 아무 것도 없이 갑니다. 그런데도 일꾼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땅한 집을 찾아서 떠나기 까지 거기서 머물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들을 영접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이 거저 받은 것이 무엇이기에 거저 줄 것이 있습니까?

 

본문 12~13절입니다.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그 집을 위하여 축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축복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 문을 통해 슬픔이 들어오지 않게 하시고 이곳에 아무른 어려움이 없도록 하시고 이 문을 통해 아무 두려움도 들어오지 않게 하시고 이곳에 아무른 다툼도 있게 마시고 이 집이 기쁨과 평화의 복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복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평안을 빌어주라고 하셨을까요?

 

평안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평화의 날을 대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어떻게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면 샬롬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갖 재앙이 다 일어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질병이 창궐해지고 전쟁이 일어나며 포로로 잡혀가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가 당하지 않는 일을 언약 백성이기에 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샬롬 곧 평안은 이들에게 복음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전하라고 합니다.

 

물론 아직 십자가 이전입니다만 성경의 기록은 십자가 이후의 기록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평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깨어졌기에 하나님과 평안도 없고 이웃과의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사이에 평안을 주시는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 평안을 미리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전하는 자들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갑니다. 그런데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집에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평안이 전한 자에게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저 받은 평안을 전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는 그 평안을 전해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어 다시 이 평안을 전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 평안이 누구에게 옵니까?

 

누가복음 2: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예수님의 탄생을 천사들이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합니다. 이 평안을 맛본 자가 시므온입니다.

 

누가복음 2:25~32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시므온의 이 평안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우리에게 비추어진 것은 참으로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본문 14~15절입니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거저 받은 평안을 거저 전하는 자들의 행색이 말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이 평안을 전하여 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있으면 평안하다고 생각합니까? 돈이 있으면 좋은 집도 사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 것도 없이 와서 평안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평안을 들고 오는 자들은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들고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로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합니다.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거나 옷자락을 털어 버리는 행위는 심판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거저 받은 평안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인데 이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평안의 소식을 거절한 1차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먼저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향하여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이유는 평화의 소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소돔과 고모라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긍휼을 버리는 행위가 유대인들처럼 자기의 의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십자가의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십자가의 용서를 다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그 결론은 그 은혜를 갚자고 하든지 아니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런 저런 행위들을 독려하게 되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인 그 은혜와 평안을 왜 값없이 거저 받아야 되는지를 정말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 곧 천국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과 다윗이 무엇을 얻었습니까?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일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만 지은 인간들에게 간음하고 살인한 인간의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진 것은 일한 것이 없이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이 복음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사망에 이르는 것은 다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시켜 주신다는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왜 값없이 거저 받았는지를 알고 믿는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입니다. 거저 받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그 어떤 것도 나를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고후4:7).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왔습니다(11:36). 그러므로 성도란 모든 것을 값없이 거저 받은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신을 받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알게 됩니다(고전2:12). 이러한 은혜를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게 되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