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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6~23 양을 이리 가운데로 2015. 11. 22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10장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권능을 주셔서 파송하십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권능을 주셨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 귀신도 다 쫓겨나고 병도 다 고치고 하는 것으로 계속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권능을 주셨다고 하셨는데도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온갖 핍박을 다 받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권능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 하는 일에 온갖 핍박을 다 받을 지라도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배척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권능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가는 길과 당하는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로 가게 됩니다. 지금 제자를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것은 십자가 이전의 일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제자가 가야하는 길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 내용들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자들은 지금 아무리 권능을 행하고 능력이 나타나도 결국 십자가 앞에서는 다 예수님을 배신하여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이리들에게 물어뜯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셨다면 호랑이와 사자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이리들을 다 제압하도록 보내면 안 됩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면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죽여 버리고 곰이 나타나서 찢어 버리는 그런 권능을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런 권능을 주실 수도 있는 분이신데 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0:24~25절입니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하였는데 제자들에게 오죽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땅에 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실 때에도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짐승의 먹이통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 같은 자들의 먹이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이리 가운데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양이 되셔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살과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다고 합니다(고전 5:7).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양을 잡아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은 것처럼 예수님의 그 유월절 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곧 자신의 생명을 주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17:14~22절입니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한 내용입니다. 흔히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이름붙이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 있게 볼 내용이 같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붙여주신 자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기에 세상이 미워합니다. 우리 안에 아버지의 말씀이 들어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이유는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낸 것 같이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연히 세상에서 미움을 받지만 그러나 그 제자들이 전한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같이 우리도 그 안에 연합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는 말씀은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롭게 처신을 잘하고 분별을 하면서도 복음의 순결함을 지키라는 식의 교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말씀을 히브리인들의 시각에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1차 청중은 히브리인들이기 때문이며 또 마태복음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내용이기도 합니다.

 

뱀이란 히브리인들에게 말 잘하는 이미지입니다. 창세기 3: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간교하다는 말이 사울이 다윗을 추격할 때에 사람들이 다윗을 평가하기를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말한 것입니다(삼상23:22). 여기서 뱀이 간교하다는 말이나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한다는 단어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이지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말할 때에는 간교하다고 하지만 다윗을 말할 때는 지혜롭다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심히 간교하더라고 표현하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얼마나 간교한지 나중에 다 드러나기는 합니다. 이 뱀이라고 지칭되는 피조물이 용 곧 마귀 사단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 뱀의 특징이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12:9).

 

이 옛 뱀 곧 마귀 용 사단으로 불리는 이 피조물이 무엇으로 사람과 천하를 꾀는 것입니까? ‘입니다. 그런데 뱀은 혀가 갈라진 짐승입니다. 갈라진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순결하게 인도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마음을 갖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옛 뱀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가 간교한 것이기에 제자들은 그런 뱀의 지혜가 아닌 순결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순결한 지혜란 비둘기 같아야 합니다. 비둘기는 짝이 죽으면 평생 수절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결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지혜롭고 순결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순결한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지혜로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17~20절을 봅니다. “봉독 사람들을 삼가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실 것이며 제자들도 이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도 끌려갈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말씀은 이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복음을 지혜와 순결한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하거나 대표기도를 하거나 간에 늘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내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하게 하시는 공급처가 어디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지 않는 내용을 설교나 기도에 담아내는 일을 얼마든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공급하시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롭고 순결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 복음을 들은 자들의 반응을 봅니다.

 

사도행전 4:1~4절입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오늘 본문 17~20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이어지는 8~14절입니다.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싫어하여 잡아 가둔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감당을 못합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의 이름이 이렇게 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며 여기에 다른 것을 섞지 않기에 지혜로운 것이며 순결한 말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옥에 가둔 자들이 하는 말이 제자들이 원래 학문이 없는 보통사람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학문이 없다는 말은 율법 선생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지혜와 순결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고 순결한 말은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지혜롭고 순결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자들을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사도행전 7:8~10절을 봅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신 그 내용대로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과 지혜로 하는 말을 감당하지를 못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모함하여 돌로 쳐 죽입니다. 그 모함의 내용은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인 내용과 같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 그 말로 스데반 집사를 죽입니다.

 

사도행전 4장이나 6장의 제자들이 전하는 내용이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 전한 순결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주동이 된 자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엄청난 핍박을 받는지 어제까지 형제라는 자들로부터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자가 40명이 됩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더욱 핍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는 길이 이런 모양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혜롭고 순결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어떻게 세상이 대하는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핍박은 가족에게서도 일어납니다. 어제까지 형제라고 여겼는데 복음이 들어가고 나니 갑자기 원수로 대합니다. 아버지와 자식 관계도 원수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자리에 내어주고 자신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도 합니다. 도대체 지혜와 순결함으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형제와 가족들 간에도 이러한 적대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7:7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볼 때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악한 일들이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착한 사람과 착한 일들이 많기에 세상이 그나마 유지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본다면 그런 마음이 바로 두 마음이며 순결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섞인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긍정적인 것들을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습니다(8:44). 이 얼마나 경악할 내용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기들의 의를 고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받아서 증언을 하니 역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복음을 전하는 자 곧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왜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대로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다 악하다고 하는 일에 정말로 수긍이 되십니까? 오늘 설교하는 저도 악한 일을 한 것이고 밥을 준비한 것도 악하다고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하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런 복음을 섞지 말고 순결하게 끝까지 증거 하면서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미움 받는다고 말을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주에 본대로 복음을 전할 때에 받아들이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머무르고 반대하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증거 하다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지역을 전체로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온 세상의 멸망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가는 곳 마다 핍박을 받을 것이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두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긍정하고 저것도 긍정하기에 왕따를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성령을 받았다면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한 몸 한 피를 나누는 것을 눈으로 보는 성찬식을 합니다. 이러한 성찬만이 아니라 모든 설교나 모든 성경공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정말 우리가 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10~13절입니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날개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은 담임목사의 욕망에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라고 하는 독재자의 발상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어떻게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진자는 바울도 베드로도 아볼로도 아니라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이 분이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로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와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말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먼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23:34).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영을 넘겨받은 자들이 어떻게 죽어갑니까? 양을 이리에게 보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순전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리들이 달려들어 돌을 던져 죽입니다. 이때 스데반 집사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사도행전 7:59~60절입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조금 다른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 영혼을 부탁하는데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께 영혼을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도 반드시 이 길로 가게 됩니다. 양이 이리가운데로 보내져서 뜯겨 죽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반드시 이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물리고 뜯겨 죽음으로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증거 되는 방식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이 길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이 길로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더욱 분명하게 새겨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