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마태복음 10:34~39 화평이 아니라 검 2015. 12. 6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오늘 본문을 보면서 헤쳐모여라는 제목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전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군대에서 잘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데 조교가 기준을 새로 정하면 지적을 받은 사람이 기준이라고 크게 외칩니다. 그러면 조교가 양팔간격으로 헤쳐모여를 명하면 기존의 질서를 다 해체하고 기준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정치나 재계나 학계나 종교계에 어떤 실세가 등장하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질서가 재편되는 것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실세에 동참하려는 세력의 갈등이 일어나며 서로 간에 원수가 되는 일도 일어납니다.

 

본문 34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메시아로 봤습니다. 메시아는 자기들에게 화평을 주러 오시는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가 가장 강력한 나라였지만 다윗 시대는 전쟁으로 힘들었고 솔로몬 시대는 세금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다른 왕들의 시대에도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을 하지 못함으로 언약의 저주를 받아 온갖 재앙들과 전쟁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사야 9:5~7절입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메시아가 오시는데 평강의 왕입니다. 그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고 하며 다윗의 왕좌에 메시아가 군림하여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보존할 것이며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열심히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9:9~10절입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메시아가 말을 타고 병거를 몰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은 말과 전쟁을 끊어 버리고 화평을 이방인에게도 전하여 그의 통치가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이방의 세력들을 멸하고 자신들만의 평화의 왕국으로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나 스가랴 선지자나 다른 선지자들도 메시아의 오심은 그들만의 평화의 나라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미 그 평화의 소식은 제한적임이 천사들의 노래로 선포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11~14절입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목동들에게 천사가 메시아 탄생을 알려줍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 된다고 합니다. 짐승의 먹이통에 누워계시는 것이 표적이 됩니다.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참된 화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천사들의 찬송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미 분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평화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심판입니다.

 

오늘이 12월 첫 주입니다. 12월이 되기도 전에 백화점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리고 시청 광장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점등식을 하였습니다. 기독교 방송만이 아니라 일반 방송에서도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곡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요란한 세상에 평화의 왕이 왔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납니다.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에 평화의 왕이 오셔서 우리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 노래도 하고 행사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시는 말씀은 내가 세상의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염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35~36절을 보시면 예수님 오셔서 하시는 일이 사람이 그 아버지와 불화하게 하시고 딸과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은 식구라고 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면 가족끼리 화평하게 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되어야 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되도록 도와 주셔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집안 식구끼리 불화가 되고 원수가 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헤쳐모여가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까지 화평을 말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신의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질서가 다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줄을 섭니다.

 

에베소서 1:7~10절입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비밀입니다. 통일교를 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인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속량을 받은 사람만 이 사실을 알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이 하늘과 땅이 몽땅 불살라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무 크게 세상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였을 때에 세상을 다 불살라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사라 버리고 자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내가 대통령이 되면 그렇게 안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만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뿐입니다. 연말이 되면 저도 헤쳐모여를 합니다. 구역도 조정하고 식당봉사당번도 조정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새롭게 오신 분들을 잘 모르시기에 제가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의 결정을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나름대로 자기를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근원을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2:21~24절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이 여자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타락하기 전입니다. 이 내용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여자인 교회를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여주시지만(5:32) 여기서 오늘 보려고 하는 내용은 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3:9~12절입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모습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는데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이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 모습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죽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결정하는 것이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원시복음이 제시되어 있지만 선악과 이후의 타락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지를 성경은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땅을 갈며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제물을 받으실 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인 선택과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벨의 제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분노하여 가인이 아벨을 살해합니다. 이러한 가인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듭니다. 이제 자기가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악기를 만들어 자기를 즐겁게 합니다. 가인의 후손인 라멕과 같은 자는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자를 살해합니다. 그리고서는 말하기를 자기를 보복하는 자는 벌이 칠십칠 배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타락 이후의 인생들입니다. 사람들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자아(自我)들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타락 이후에는 자기를 중심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살아갑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도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으면 배척합니다. 적이라도 자기를 이롭게 하면 가까이합니다. 이런 상태로 사람들은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평화유지군이 있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9:1~9절입니다.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보고 웁니다. 그러면서 광야에 머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그곳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산다는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가득합니까? 간음, 반역, 거짓, 완전히 속임, 비방, 사는 곳이 전부 속이는 일,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에는 해를 꾸밉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이 이러하다면 온 세상이 다 이러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들이 살아가는 세상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진리를 말하고 선과 악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선과 악 진리의 해석들은 다들 자기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평화는 다 거짓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입니까? 화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검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 본 대로 인간이 타락함으로 스스로 신이 되었다고 착각하기에 모든 세상만물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이며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신을 섬겨도 자신을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도와주는 신을 섬기는 것이기에 결국 자기 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산 앞에 도착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지 40일도 안되어 배반합니다. 이때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내는 신이 우상입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돌 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밑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출애굽기 32:26~29절입니다. “26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금송아지 사건 때에 레위지파가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 헌신은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칼로 죽인 것입니다.

 

신명기 13:6~10절입니다. “6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7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8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9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애굽 땅에서 어린 양의 피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떠나게 하는 자라면 선지자이든 가족이던 죽이라고 합니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예수님은 자기 자신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한다면 심지어 자기 목숨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나를 사랑하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도 결국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믿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데 나는 잘 믿어서 천국가려고 한다면 이것도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족과의 불화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불화가 일어나야 마땅합니다. 물론 교회라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그리스도의 하나 된 교회라면 한 몸이기에 분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교회들은 각양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분쟁들을 통하여 누가 진짜 그리스도의 몸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름과 아무른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본문 36~39절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미가서 7: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미가서의 내용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원수같이 되는 때가 왔기에 서로 믿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자기를 따름으로 인하여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것입니까? 나를 중심으로 한 세상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그 어떤 관계도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합당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수납이 됩니까?

 

마태복음 12:46~50절입니다.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며 자매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가족도 배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나의 가족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나의 직장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나의 알량한 자존심 하나 내려놓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죽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믿고 따릅니까? 물론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온갖 이단들은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자기 교주나 교단에 바치라고 합니다. 그런 자들이 다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돌봐야 할 가족을 버리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들입니다(딤전5:8).

 

요한복음 14:26~27절입니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성령님이 오셔야 됩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분리시키십니다. 세상에서 잘라내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검으로 우리를 잘라내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이 일에 부름을 받은 자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9~23절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와 부활이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모습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이때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부활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주시니 제자들은 세상에서 분리되었지만 주님의 주시는 평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분리와 평안을 함께 맛보아 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이 평강은 말씀의 검에 의하여 기존의 모든 틀에서 잘려나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평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