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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40~42 영접하는 자의 상 2015. 12. 13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 본 38~39절 말씀에 자기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란 사형 형틀이기에 자기 십자가란 자기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씀은 자기 목숨을 잃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와 닿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긍정으로 똘똘 뭉쳐진 채로 태어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은 자기만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니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고 돈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 말세에 고통당하는 때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이런 모습이 말세의 고통당하는 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 때도 있었던 일이며 소돔과 고모라도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둘 다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정말로 자유롭습니까? 이러한 말세의 고통당하는 때를 살아가면서도 노아 홍수 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롯의 아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이런 세상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이런 방향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러한 세상의 영광과 자랑들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런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다시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지옥이 무서워서 그렇게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저를 믿음이 좋은 아이로 착각하고 교회에서 상도 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 안에 반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이런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이 말씀을 이루어내십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교회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자기를 긍정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이 아니라 자기가 깨어지고 부수어지기 위하여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주장, 자기고집, 자기의 뜻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자기긍정이 부인이 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말씀으로 깨어지고, 교회 일을 하면서 깨어지고, 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깨어집니다. 무엇이 깨어지는 것입니까? 자아라는 것, 자존심이라는 것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할만한 매력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10장 전체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는 모습이 노숙자의 모습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복음만 들고 가야합니다. 영접하는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지낼 것이며 영접하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합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핍박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오셨다는 이 복음을 누가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를 영접하거나 그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일도 사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이익과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는 인간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람을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타적인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행위를 하여도 그것도 결국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의 확대이기에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때로는 금욕을 하면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런 모습 자체가 육체이기에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절제력과 금욕적인 능력을 자랑하기에 결국 자기 긍정이며 자기 확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누가 영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전도지에 대부분 이 말씀만 따와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면서 영접을 시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11절까지 보시면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들이라는 이스라엘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영접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것은 13절의 말씀대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영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복음 전하는 자를 영접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복음 전하는 자를 영접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무엇을 얻게 됩니까?

 

본문 41~42절을 봅니다. 선지자, 의인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자 또는 의인이라고 하는 부분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보면 됩니다. 42절의 예수님의 제자라는 가장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것은 신약의 복음을 전하는 자와 영접하는 자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먼저 구약에서 선지자를 영접한 사람과 그가 받은 상이 무엇이며 이런 선지자들이 바라본 상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가장 작은 자에게 한 자들이 어떤 상을 받는 것인지 성경을 통하여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머무르는 내용입니다. 3년이나 가뭄이 계속되는 중에 엘리야 선지자가 그릿 시냇가 거하다가 여호와의 명령으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갑니다. 마지막 한 움큼 남은 가루와 기름 조금 남은 것으로 마지막 떡을 해 먹고 굶어 죽어야하는 이 집에 갑니다. 엘리야가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에게 자기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흉년이 마칠 때 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친놈이라고 쫓아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과부가 마지막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에게 줍니다. 그러자 그 집의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영접하여 떡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가정의 상입니까? 그런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어버립니다. 이때 이 여인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내 아들을 죽게 하였느냐고 합니다. 선지자를 영접하였는데 아들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무엇을 알게 됩니까?

 

열왕기하 17:18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선지자를 영접하였는데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한 것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입니다. 이 때 엘리야는 그 과부의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살려줍니다. 그때 이 과부가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받은 상은 무엇입니까? 떡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것보다 죄와 사망의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 더 큰 상입니다. 이러한 일을 엘리사도 자신을 영접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지자들을 영접한 자들이 무엇을 상으로 받았습니까?

 

히브리서 11:35절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를 영접한 사르밧 과부와 수넴 여인이 무엇을 상으로 받았습니까?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자기의 죽은 자가 소생한 것이지 부활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하여 부활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고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와 의인을 영접한 자의 상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영접한 자는 의인을 상을 받는다고 해서 상이 여러 종류가 있고 상의 차등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상이란 히브리서 10:35절의 말씀대로 부활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단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부활 즉 부활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상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하를 얻어도 네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셨을 때에 단시 이 세상의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 날에 영원한 생명의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참으로 영원한 상급이 됩니다. 반면에 그날에 심판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 영원한 형벌입니다.

 

본문 42절에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가장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고 대접한 자는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영접한 사람이 무엇을 받았습니까? 부활에 대한 소망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받은 상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엘리야가 찾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영접하였고 수넴 여인은 지나가는 엘리사를 자신이 청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려고 한 것임을 히브리서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도 복음 전하는 자와 영접하는 두 사람을 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과 베드로와의 만남이 나옵니다. 고넬료는 이탈리아 군대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경건하여 그의 온 집안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여 많이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 욥바의 해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가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합니다. 이때 베드로는 기도 중에 있는데 환상이 보입니다.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먹지 않았다고 하자 주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환상이 세 번이 있고 나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할 때에 주의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그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11~15절을 보시면 바울의 일행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아 강가로 나갔는데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는 여자의 마음을 주께서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서 바울 일행을 청하여 자기 집에 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일행이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거절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얼마나 강력하게 자기 집에 유하라고 청하는가 하면 나로 주 믿는 여자로 여긴다면 우리 집에 유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영접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일행도 영접하여 그 집이 유럽의 첫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약의 두 가지 이야기와 신약의 두 가지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말씀을 받는 사람도 다 주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13:2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예수님께서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것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예수님께서 보낸 자 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정말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상고해 보셔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하여 구약의 두 사건과 신약의 두 사건을 보았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전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도 물론 영접을 합니다만 전한 사람이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하는 자는 또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러므로 영접이란 그 사람의 말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하는 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전하여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 영 곧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알려준 것이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사들도 놀라운 내용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을 봅니다.

 

고린도전서 2:1~5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사도가 그리스도 아테네에 가서 말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여보았습니다. 그런데 말과 지혜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 아테네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바울도 세상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의 말과 지혜로 그리스도를 증거 해보려고 하였지만 그곳에서는 어떤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로 내려와서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말과 전도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면 무엇이 드러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내용임을 이미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믿게 되었다면 이런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2:6~9절입니다.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 지혜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세상의 지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여 두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여 두신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로마서 5:8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으로 됩니다.

 

고린도전서 2:10~15절입니다.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영은 은혜가 아니라 인과율이며 거래입니다. 세상의 영에 붙들려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곧 성령을 받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온 전신이 문둥병이 든 자임을 알게 됩니다. 세포 하나하나 까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영으로 보냄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며 이들이 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3:5~8절입니다.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복음 전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거저 주께서 주신대로 씨를 뿌리고 물을 준 것일 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부름을 받았기에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하는 자도 영접하는 자도 상을 받게 되는데 이들이 받는 상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 42절의 예수님의 제자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양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리고 갇혔을 때에 나를 돌보았기에 창세전에 예비 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들은 그렇게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염소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시자 언제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양은 은혜로 한 것이기에 자기가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소는 자기가 한 것이기에 언제 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의가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복음은 세상이 볼 때에 보암직한 모습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완성이라고 하는 이 복음을 누가 받겠습니까? 이렇게 전하는 자들도 가장 작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 복음을 영접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45~46절입니다.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영접하는 자가 받는 상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