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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9~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2016. 8. 21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1)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지난주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여기가 좋다고 하면서 초막 셋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그곳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눈에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로도 보지만 지난주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별세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별세는 이미 출애굽이 별세이며 이런 출애굽이라는 별세는 이 세상에서 엘리야처럼 하늘로 가는 별세여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하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따라다닌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가 되심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볼 때에 우리가 이 제자들의 입장이 되어 봐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의 시각이 아닌 제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근거 없이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모세가 말하였고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또한 수많은 율법의 선생들이 성경으로 메시아를 전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성경선생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이 메시아가 올 때에는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까지 알리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 놀라운 영광을 목격한 제자들이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지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도 평소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제 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고 찬양을 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인도 이유도 모를 은혜와 평강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은혜가 된다는 사람은 설교시간이 짧게 여겨질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루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은혜를 충만히 맛보는 자리라면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는 하산을 해야 합니다.

 

저도 이번 휴가는 산으로 갔습니다. 월요일 수련회 마치고 거제에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 근처에 조용배 집사님이 계셔서 만나고 왔습니다. 그러니 저녁 늦게 와서 화요일은 집에서 쉬었습니다. 수요일 거창 금원산 휴양림에서 텐트를 치고 이곳이 좋사오니 하려고 했는데 동기 목사의 모친이 별세하셔서 제가 장례 순서를 맡아서 그 다음날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설교 제목도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머무르고 싶은 곳이 있어도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산 아래는 온갖 문제들이 산적하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으로 내려와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는 변화산의 그 영광은 잠시 잠간 맛보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이란 이상한 신비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고 예수님 외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머물 수가 없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출애굽기 32:15~19절입니다. “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 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이 말씀에서도 모세가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의 중재자가 되어 송아지를 피를 뿌려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증서를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40일간 머뭅니다. 그 동안 모세의 얼굴은 여호와와 함께 있었기에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는 모세가 보이지 않자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내라고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아론은 금으로 된 귀고리와 손의 고리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언약을 40일도 안 되어 배반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언약을 체결하고 먹고 마시고 뛰어놉니다. 모세가 증거 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실 때에 모세는 중보 합니다.

 

출애굽기 32:7~14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산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산 아래는 금송아지와 언약을 체결하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어 놉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시면 여호와와 언약을 체결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 70명이 여호와의 발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렇게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체결하고 먹고 마실 때에 여호와께서 손을 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오직 언약의 피 뿌림 안에서 그들이 용납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배성들이 언약을 체결하고 나서 모세가 40일 동안 보이지 않는다고 금송아지 만들어 잔치 중에 있습니다. 이들을 진멸하겠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에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바를 기억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언약하신 것 때문에 용서하셨습니다.

 

드디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는 언약의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립니다. 그 돌 판이 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돌 판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계명과 제 2계명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과 자기를 위하여 어떤 형상물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하여 신을 섬기고 종교를 가지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가 되며 언약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대로 하면 진멸당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돌 판이 깨어짐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깨어지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잠시 보이지 않았다고 산 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지 못해서 쩔쩔 매고 있습니다. 산 위와 산 아래가 이러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이 사실이기에 산 아래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런 일들에 함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들에 다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산위에서 일어난 효력이 미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9절을 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까! 정말 말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유대인 성인 남자 두 명이 증언하면 법정에서도 증거로 채택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함께 봤으니 이들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고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고 살아나기 전에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아직 모르기에 금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였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분명하게 엘리야를 봤습니다. 엘리야가 왔기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하여졌는데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숨겨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제자들의 메시아 관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세례요한도 의심한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메시아를 바라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기다리게 된 것은 선지자들의 증언을 문자대로 받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은 메시아의 날에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라기 4:1~6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읽고 듣고 가르침을 받아온 자들입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이라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여호와의 큰 날 곧 메시아가 오시는 그 날에는 자신들은 구원을 받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율법도 모르고 힘이 있다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강대국들로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큰 날, 즉 메시아가 오시는 날에 그들을 자신들의 발바닥의 재와 같이 될 것을 사모하면서 모세에게 명령한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며 지키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오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돌이키지 않으면 주께서 오셔서 저주로 그 땅을 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배우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에게 엘리야가 오리라는 약속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봤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엘리야의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엘리야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엘리야의 사역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십니다.


본문 11~13절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이 말라기서의 엘리야가 오리라는 말씀이기에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말보다 더 권위가 있으신 분의 말씀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합니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그제야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리라는 엘리야가 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온 것입니까? 엘리야는 이 땅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엘리야가 다시 와서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잘 믿을 것인데 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엘리야의 사역을 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의 반열대로 성전에서 직무를 행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서 아들을 낳을 것과 그의 이름까지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이름도 자기 아버지가 임의대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계시를 받은 대로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아이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여 아이를 낳을 때 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름을 지을 때에 집안사람들이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하자 사가랴가 말을 못하니 형용으로 아니라고 하고서 서판을 달라고 하여 요한이라고 이름을 써니 그때에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이름이 주어질 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3~17절입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요한의 이름을 천사가 알려준 계시에 의하여 이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 하는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역할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일을 하는 자가 엘리야로 이름을 지어도 되는데 요한으로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예측하여 엘리야를 알아보고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도 하고 그 영광도 보았습니다만 다시 엘리야에 대하여 묻는 것은 자신들이 확인하는 방법으로 메시아를 맞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린 메시아를 배척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법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사역한 세례 요한조차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정도로 혈육이 강한 것입니다. 그들의 혈과 육으로 생각한 메시아가 오려면 엘리야가 와서 회복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임의로 대하였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거침없이 전하였습니다.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물로 세례를 베풀 때에 오직 예수님에게만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거침없이 헤롯에게도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엘리야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유대의 권력에 의하여 세례 요한은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길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엘리야가 세례 요한인줄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조차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의심한 것은 그들이 생각한 유대인 중심의 메시아사상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치고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메시아가 나타나서 무엇을 행하여야 합니까?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엘리야의 일을 할 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 제사장에게 알려준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메시아가 와서 세상을 심판을 해야 합니다. 말라기서의 말씀대로 하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집행이 되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발 앞에 재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산 아래의 현실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본 그 놀라운 영광의 모습이 산 아래로 내려오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들이 평소에 보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삶의 현장도 산 아래의 모습과 같습니다. 산 위에서 경험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온갖 문제가 산적하여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합니다. 땀을 흘려야합니다. 때로 비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간다고 해서 그런 영광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이 기도원에 올라가서 며칠 부르짖고 내려왔다가 마음이 컬컬해서 다시 올라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도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현장에서 복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자유와 감사가 있다면 그것은 산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산위에서 계속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듣고 살아가야 하는 장소는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 까지 이 땅입니다. 산 아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에서 산 위에서 본 그 내용들을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영광중에 계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임하여 계십니다. 그 영이 임한 자들은 이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산 위의 영광을 맛보면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베드로후서 1:16~19절입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강림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들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친히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 영광중에 음성을 친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이 말씀입니다. 이 더 확실한 예언이 어두운데 비추는 등불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산 아래에 사는 우리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산 아래에는 산 위의 영광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확실한 예언인 이 기록된 말씀들이 우리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날이 새어 샛별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 말씀들에 주의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장차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믿는다면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산위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고 명하십니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다고 찬송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괴론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산위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생이 다하는 그 날에는 다시는 산 아래 내려오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삶이 있습니다. 이 소망으로 살아내게 하실 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