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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17-21 유황불 붙는 못 2010. 2. 21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오늘 말씀에 17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하면 어떤 상상이 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니 멋진 잔치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절한 심판이 집행이 되는 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잔치가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것으로 역사는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간단하게 말하면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이란 어린양의 희생으로 마련된 곳입니다. 그러면 지옥이란 어떤 곳이겠습니까? 어린양의 희생이 완전히 무시되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이 지옥에 대하여 20절을 보시면 ‘유황불 붙는 못’이라고 합니다. 이런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원색적으로 말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옥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늘 희망을 말하고 종말적 심판도 희망으로만 말하지 꺼지지 아니하는 ‘유황 불 못’과 같은 것은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설마 그런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 놓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착하고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많은 사람들도 지옥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만인 구원설도 나오고 연옥설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 자들이라도 결국은 그곳에서 갱신의 기회를 얻어서 다 구원 얻는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옥을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광신도 취급받는 세상입니다.

 

물론 지옥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여 특정인을 순종하게 만드는 이단들도 많습니다. 지난 주에 임시노회가 있었습니다. 노회 안에 몇 교회가 이상한 곳에 빠져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권사가 사도라는 것입니다. 사도이기에 절대복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그런 이단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자 한 장로님이 그런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고 그저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만 귀에 잘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이 귀에 잘 들어옵니까?

 

17을 봅니다. ‘또 내가 보니’ 장면이 바뀐 것입니다. 바로 앞의 장면은 백마 타신 이가 승리한 내용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승리는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그것으로 만국을 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으로 심판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옷이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아서 붉게 물이 들었다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17-18절을 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승리하셨으니 패배한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의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가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과 종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똑 같이 새들의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잔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상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큰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아의 날이 임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메시아만 오면 그들은 구원의 날이며 큰 기쁨과 잔치의 날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판은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중에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기다리는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이 날이 될 것임을 경고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봅시다. 왜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였기에 우상 숭배의 중심지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을 심판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바벨론의 멸망을 알고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에스겔 39:17-24절입니다. “봉독” 요한 계시록의 하나님의 큰 잔치라는 것이 에스겔서에서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의 내용의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곡과 마곡이라는 연합군이 오는 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모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심판과 구원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에 구원받는 자들도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구원을 얻는 자들은 자신이 심판아래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놓였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종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자기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누가 믿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증거하고 믿는 것은 사람의 기분을 맞추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 땅에 속한 것들을 더 좋아하기에 죽임당한 어린 양에게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승리하는 왕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그런 왕이란 결국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며 땅에서 나온 짐승인 것입니다. 이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그런 것을 영원하게 보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모습입니다.

 

19-20절입니다. 또 다른 장면이 보입니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땅에 속하여 땅의 것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어느 나라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자는 나라가 있습니까?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선서하는 미국도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자는 말을 대통령이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국민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가체제를 떠받들도록 미혹하는 자가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를 하였지요! 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진리냐 비 진리냐의 문제보다 현실적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복을 많이 받아 사느냐를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교회의 장로님이 하는 말입니다.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인데 교인들이 생각이 이러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교인들의 마음을 좋게 하려면 천국도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참으로 은혜롭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아무 한 것도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길은 그것으로 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하기 나름대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거저 기본으로 취급하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사는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분당의 어느 큰 교회당의 금요철야예배를 TV로 보았습니다. 지성소도 이야기하고 지성소의 휘장을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실 때에 찢어진 이야기도 하고 성전이 성도의 몸이라는 것도 말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성전이고 천상성전으로 연결되는 것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말하는 교회란 자기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축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요일 그 큰 예배당에 자리가 꽉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교회란 자기들의 출석하는 교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 속한 것이 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에 살라질 것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불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이해관계도, 세상의 믿던 모든 것들도 다 끊어질 그날이 옵니다.

 

20-21절을 봅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히고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집니다.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새들에게 먹히는 자들은 유황불 붙는 못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20:15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둘째 사망이며 사망과 음부도 이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인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 참여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복음칼럼 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세계가 심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최종적인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세상의 가치관에 우리의 최종관심사가 있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밭에 좋은 씨를 심었는데 가라지가 생겼다는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해석하여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며,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며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 꾼은 천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9:43-49절입니다. “봉독” 지옥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기 보다는 범죄 하게 하는 손이나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 버리라고 합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데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의 사위들처럼 소돔과 고모라가 불에 살라질 것이라고 하는 말을 농담으로 여기다가 유황불이 쏟아져서 심판을 당한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도 농담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로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벗어날 수가 없음을 아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이 자신의 저주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영이 임한 자는 자신을 영원한 유황 불 못이라는 지옥에서 건져주심 만으로도 영원토록 감사할 것입니다. 지금 비록 거지 나사로처럼 산다고 하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