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33~4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020. 4. 12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사람들이 조롱한 내용이었습니다. 조롱한 자들은 지나가는 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강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똑같이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는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자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십자가의 처형은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은 죽음이라(21:23)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는 로마를 반역한 자들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죽음으로 보였습니다(고전1:23).

 

본문 33~34절입니다. “봉독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시간이 오전 아홉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세 시간이 지난 열두 시에 온 땅에 어두임이 입하여 오후 세시까지 계속됩니다. 오후 세시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십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버림받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일이 되는지를 알고 믿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물론 알고 믿는 일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기에 우리에게도 성령의 일하심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어두움이 임하였다는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합니다. 혼돈과 흑암의 깊음 위에 하나님의 영이 품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때 빛이 있으라고 하십니다(1:1~3). 어두움을 배경으로 빛이 나타납니다. 물론 이 빛은 영원한 빛입니다. 이 빛을 드러내는 배경이 어두움입니다. 천지창조 후에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은 다시 어두움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언약을 계속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려고 모세 때에 출애굽을 이루어내십니다.

 

출애굽기 12:42절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밤이라고 합니다. 아홉 번째의 재앙이 흑암의 재앙입니다.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흑암의 혼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어두움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 곧 심판의 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13:9~12. 2:2,10,31. 8:9~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지만 그 날이 구원이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뜻을 거짓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을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20절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이사야 5장이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에 심으셨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골라내고 좋은 밭을 만들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맺은 것은 악한 열매들만 가득합니다. 부동산 투기를 금하였는데 부동산 투기를 합니다(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어댑니다(18). 이러면서 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로 알게 해 보라고 합니다(19).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 와보라는 조롱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전복되어 있습니다. 악을 선이라고 하고, 흑암을 광명이라고 합니다. 쓴 것을 단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뒤집어져 있는 이런 나라의 모습이 어두움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아모스 5:18~24절입니다.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여호와의 날이 어둠이 되고 캄캄한 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망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사야 9:1~2절입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 약속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4:12~17절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전깃불이 나가는 것이 어두움이 아닙니다. 코로나로 경제가 어려운 것이 어두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예수님을 부르지만 다른 예수를 부름이 어두움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2)깨닫지 못하더라태초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이 빛으로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빛을 십자가에서 제거하였지만 그러나 그 어두움이 결코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5절의 각주).

 

본문 33~36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부르짖음을 곁에 섰던 자 중에 어떤 이들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합니다. 말라기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엘리야로 알아들은 모양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들어준다는 자비이기 보다는 오히려 목숨을 연장시켜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는지 보자는 조롱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여기서 소리 지르셨다는 말씀은 문자대로는 숨을 내쉬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에서 숨이란 루아흐이며 헬라어로 프뉴마곧 영과 성령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영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9:30절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고개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번역하지만 그 영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이 예수님 자신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죽으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는 일입니까? 죽음으로 그 생명의 영을 넘겨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이루실 일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주시는 것(3:14~15)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 주시는 것(8:28)과 예수님에게로 이끄신다는 것(12:32)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음이 우리에게로 버림받음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 우리를 짊어지시고 살려내시는 일입니다. 오늘이 전 세계적으로 교회에서 지키는 부활절입니다. 우리도 모임을 가졌다면 성찬식을 하고 세례식을 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전합니다.

 

시편 22:1절을 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조롱당하는 모습을 21절까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찬송으로 바뀌는 내용이 22절부터입니다. 22~31절을 봅니다. “봉독 버림받은 자의 탄식이 갑자기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찬송하면서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고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29절 뒷부분을 보면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라고 합니다. 돌아오는 자도 경배하지만 심판 받는 자도 그 앞에서 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6~11절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지금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는 자들은 재림의 날에 심판을 받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입니다. 얼마나 거룩한 곳인지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제사장이 희생의 피를 들고 가서 언약궤 앞에 뿌리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나가게 됩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성소의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어짐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피를 힘입어 그 생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살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다 죽음의 길입니다. 다 어둠에 갇힌 자들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라고 빛이라고 하는 것들도 다 어두움이었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도 캄캄한 어두움입니다. 대제국 로마의 정치와 법조문들도 어두움입니다. 이러한 어두움들이 빛으로 가장하고 있기에 참으로 빛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을 빛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볼 수 있습니까?

 

본문 39절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지휘한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자기가 처형하고 있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두움과 지진들이 복음서에 기록되었지만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 보다 더한 기적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 무력하게 죽어 가시는 그 예수님을 보고서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본문 40~41절입니다.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멀리서라도 목격한 여인들이 있습니다. 죽는 곳에도 함께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목격자로 등장합니다. 부활의 첫 목격자도 여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힘으로 증거 됨이 아니라 약함으로 증거 됩니다.

 

골로새서 1:13~17절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때에 자신이 빛 인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단의 괴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다 잡아 죽이는 일이 빛 된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어두움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아나니아가 기도하니 눈이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모세의 수건이 벗겨지자 무엇이 빛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다 싫다고 버린 예수님의 십자가가 참 빛임을 즉시로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은 빛을 압니다. 어두움의 권세에서 빛의 세계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들이 다 이루어내신 일이 십자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에 붙들린 자들을 사로잡아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넘겨주신 그 성령이 임한 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천지창조 때와 출애굽의 때에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때에 어두움이 임하지만 그 일이 새로운 창조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시간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순서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만물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만유의 주 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십자가로 다 이루십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복음은 이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모습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전도 자체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존의 가치체계를 전복시키는 일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전염병이라고 격리시킨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하도 다른 복음이 넘치니 전염병을 통하여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롯이 나오미의 무엇을 보고 따라옵니까? 시아버지 죽고, 남편 죽고, 동서 남편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을 목숨 걸고 따라옵니다. 이것이 택하심을 따라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힘씀과 노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의 외침을 믿은 어느 신학자 이야기를 봅니다.

 

로완 윌리엄서의 마르코 복음서 읽기 복음을 읽다에서 인용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수감 기간 동안 그와 다른 포로들은 벨젠과 부헨발트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의 실상을 사진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키려 싸운 정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세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몰트만은 어느 군목에게 성서를 건네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당연히 신학 교육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쭉 읽어가던 나는 예수가 고난 받는 장면에 도달했다. 죽어가는 예수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내면에서 믿음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너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느님을 향하여 울부짖을 때, 그 자리에서 함께 울부짖는 사람이다.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버림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 나는 시련에 처한, 버림받은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난 받고 있는 하느님의 형제요, 나와 함께 이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길동무이자 나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친구다. 나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자서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죽어가는 그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사람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그 죄를 자신이 지고 십자가로 가십니다.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는 한 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처형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로 다 이루심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여 그 십자가 안에서 빛을 보고, 생명을 얻고, 안식과 살아갈 용기를 얻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