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1~13 산 위에서 2019. 5. 19

 

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우리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교회를 다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나의 행위로 만들어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산 아래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산 위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고 다음 주는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겠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기도 하고 오늘 본문과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영광의 길이 아니라 부끄러운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거리끼고 미련한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는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로 구원과 심판이 확정 됩니다. 십자가로 구약의 모든 사람이 확정이 되고 신약의 성도들도 그렇게 십자가로 구원과 심판이 적용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게 되지만 이것은 세상이 알아보는 권세와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시면 그 성령이 임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이며 영광임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과 부활 이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자들 몇 명을 산위에 데리고 가셔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1절의 말씀을 하신지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과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이 세 명의 제자가 산에 올라가고 싶어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앞에서 예수님이 변형이 되셨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의 영광을 볼 때에 나온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전에 이미 예수님이 영광의 주님임을 본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하셨을 때에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합니다. 여기서는 말하는 내용이 없지만 누가복음 평행구절에서는 별세를 의논하셨다고 합니다. ‘별세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엑서더스입니다. 출애굽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인도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별세를 의논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별세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별세도 시키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죽었지만 그 무덤을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34:6). 엘리야는 하늘로 회오리바람 타고 올라간 사람입니다(왕하2:11).

 

이러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떠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시킨 것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자기 백성을 출 세상 시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의 역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들의 나라이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아들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심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영광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4:12~18절입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 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부르심을 입고 올라가 여호와의 영광을 뵙고 말씀을 듣습니다. 산 위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임재 가운데 말씀을 받고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산 위와 산 아래가 이렇게 다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안에 산 아래서는 믿음 없는 모습만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모습과 산 아래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면서 랍비라고 부릅니다. 산에 올라오기 전에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고서도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을 보고서 랍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 선생을 부를 때에 흔히 하는 호칭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동급으로 생각하여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좋았기에 자기들은 초막에 있지 않아도 되고 세분을 위하여 초막을 지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지금 그 영광이 몹시 두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지 모르는 것입니다. 모세아 엘리야가 왜 등장하였는지도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보여주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들이시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12:32)

 

본문 7~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난 소리입니다(1:11).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고 문득 돌아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시편에서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보는 레위기는 모세의 율법입니다. 여러 가지 제사제도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 엘리야가 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본문 9~13절입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산에서 내려옵니다. 다음 주에 이 본문과 연결하여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겠습니다만 제자들이 산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산 아래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 영광의 주님께서 왜 죽어야 하시는지를 모릅니다. 그들의 메시아사상에는 죽은 메시아가 없었습니다. 그 영광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왕으로 등극하시면 되실 텐데 왜 자꾸 죽음을 이야기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서기관들이 메시아 오시기 전에 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가르치느냐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구야의 마지막 성경 말라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신 말씀입니다(4:5,6).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유대인들 생각에는 자기들의 구원의 날이며 자기의 적들은 심판의 날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의 역할을 한 자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회개는 엘리야가 와서 그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도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말하는 서기관들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보지 않으며 세례 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는지 사람으로부터 왔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하늘로서 왔다고 하면 그가 증거 한 예수님을 왜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며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기에 백성들이 그들을 배척할 것이 두려워서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일은 인간으로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2:8~10절입니다.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셨는데도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서도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창시자가 고난과 죽음으로만이 자기 백성을 끌어안으시고 산 위가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의 고난을 통하여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6~21절입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서도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이 기록된 말씀을 주의하여 봐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이나 표적이나 기적들을 통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고 세상의 영광을 전하는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