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요한계시록 22:13-14 종말의 복 2010. 6. 13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3절을 봅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시작과 마침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삼중으로 사용합니다. 삼중으로 사용되는 것은 완벽한 것입니다. 시작부터 마치는 일에 있어서 그 어느 누구도 나서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이루어내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에 우리가 개입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운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끝장내실 것도 전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종말의 시대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종말이란 메시아 오심과 성령이 임하심을 종말로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이 영이 임한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반드시 말세의 특징을 보여주게 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임박한 종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돌이키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과연 종말의 복을 보여주며 또한 사모하는가를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종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로 호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축구가 16강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복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증거 하고 있는 일곱 가지 복을 정리하면서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첫째, 요한계시록 1: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3:2절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며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여호와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여호와의 모든 언약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빠뜨리지 아니하시고 완벽하게 다 이루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단지 구속만 다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심판할 자는 심판하고 구원할 자는 구원하시는 것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읽고 듣는 것은 하겠는데 지키는 것이 힘든 다고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옛 하늘과 옛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영이 임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 영원한 복인지 알게 됩니다. 종말의 영은 진리의 영이기도 하기에 우리를 참된 진리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종말을 품고 사는 겁니다.

 

야고보서 5:1-6절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과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한 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이 위력을 발휘하는 때가 종말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복이 좋다고 스스로 찾아 나설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복을 자기 백성들에게 수여하시기에 이런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사는 무엇을 복이라고 여기며 불행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재산상의 이익이 오면 복으로 여기고 손해가 오면 불행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기준은 재산만이 아닙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높아지면 복으로 여기고 자존심이 상하면 하나님도 싫은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복이나 요한계시록의 이런 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핍박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종말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 14:13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주를 위하여 수고하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죽으면 주 안에서의 죽음이겠습니까? 아니면 주 밖에서의 죽임이겠습니까? 먹는 것도 나를 위하여 마시는 것도 나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니는 것도 나를 위하여 다니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을 생각하며 사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평생을 수고하는데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에게 과연 주 안의 쉼이 있겠습니까?

 

14:6-13절을 봅니다. “봉독” 영원한 복음이 증거 됩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창조주에게 경배하여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하며 그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인데 그들은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며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기를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모든 삶의 목표와 방향은 자기 자신을 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자입니다.

 

셋째, 요한계시록 16:15절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에 자기 옷을 지켜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둘째 복을 살펴보면서 부끄러운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위하여 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인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6-8절입니다.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ㄱ)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사 28:16)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ㄴ)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시 118:22) 8 또한 ㄷ)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사 8:14). 같은 돌인데 믿는 자가 있고 버리는 자가 있습니다.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걸려 넘어지는 심판의 돌이 됩니다.

 

넷째, 요한계시록 19:9절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할 때에 자기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십니다.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청하였으나 사람들은 바쁘다고 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는 마련되어 있으니 아무나 데려오라고 합니다. 종들이 아무나 데리고 왔습니다. 잔치 집에 손님들이 가득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왔는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래서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데 내 던지라고 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자기 옷이 잔치 집에서 나누어주는 옷 보다 좋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의 보다 자기가 만든 자기 의를 의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예복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에 간 중국은 소수민족인 묘족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한족에 밀려서 변방으로 산지로 밀려나가서 아주 높은 산골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족은 덩치가 큰데 묘족은 너무나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오후 늦게 일을 하고 수요예배가 저녁 8시 30분에 드립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그대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도 귀하고 그렇게 씻지 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찬양대는 그들의 전통복장을 입고 나와서 찬양을 했습니다. 오후에 사진을 보겠습니다만 그 옷은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그 옷을 입으면 더러움을 가릴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요한계시록 20:6절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진 사람이 복이 있기에 둘째 사망이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 요한계시록 22:7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읽는 자와 듣는 자가 빠졌지만 첫째 복의 반복으로 봅니다. 이제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보이는 하늘과 땅만 믿고 사는 사람은 함께 영원한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일곱째, 요한계시록 22:14절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는 이미 보았던 대로 예수임의 피로 만들어진 의의 옷에 자기의 공로로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나의 공로와 행위가 들어가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온전하게 주신 의의 옷을 거저 얻어 입는 가난한 거지의 심정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기 죄를 알게 됩니다. 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을 두 번 말씀합니다. 그리고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복이 있고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나머지 세 번의 복이란 다 예복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복을 지켜야 하고, 예복을 입어야 하고, 예복을 빨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2절입니다.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 신부가 어찌 그 패물과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맞습니까? 주님의 보혈로 마련된 예복은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