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2010. 7. 2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가 주일학생이었을 때에 동네 어른이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느냐면 그 어른이 시계를 끼고 있었는데 날짜가 나오는 칸에 한문으로 요일이 나온 것을 제가 읽었습니다. 그러자 너 한문도 아느냐며 이야기 시작이 되었는데 사실 한문을 안 것이 아니라 그 날이 무슨 요일인지 알았으니 읽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주일 오후에 본 시편 62:9절의 말씀에 인생은 속임수라는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기억도 자기 필요에 따른 조합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 어르신의 말씀에 기독교는 부모 공경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주일학생이었지만 십계명을 어느 정도 외우고 있었기에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 어른은 아마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가지고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도 공경을 받아야 하지만 죽어서도 자식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조상은 신이 된다고 하여 제사 때 지방을 쓰면 신위(神位)라고 씁니다. 그러니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고전10:20).

 

그러면 성경의 부모공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 자신이 어떤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고 그 구원을 전달하는 부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서론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0:1-2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받아 나온 부모여야 합니다. 이런 구원이 일어난 것은 단지 애굽에 있었던 부모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새 신자 반에서 창세기를 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이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하지만 믿음이 하나도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 살기 위하여 아내를 동생이라고 하고 아내를 팔아넘기는 아브라함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고 이삭도 그렇게 하고 야곱은 말할 것도 없는 사기꾼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런 인간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여 내심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조상들의 모습을 알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에 그런 구원을 받은 부모가 그런 구원을 자식에게 증거 하여야 공경 받을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내가 너를 낳았기에 마땅히 공경하여야 한다는 그런 계명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신명기 6:1-3절입니다. “봉독” 너희의 하나님이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하시면서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것이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단지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장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네 부모들이 어떻게 구원받아 나왔는지를 잘 알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지 아니하고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부모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평소에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는 개념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모 공경의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신명기 6:4-9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봉독” 이런 부모가 있습니까? 요즈음 공익광고 중에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그런 광고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부모는 멀리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고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고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고 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된 우리에게 다시 물어봅시다. 나는 부모입니까? 신앙의 부모입니까? 세상의 광고에서 말하는 부모도 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성경학교보다 학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어떠합니까? 4-9절을 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서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합니다. 어느 정도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까? 7절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일주일에 교회 한번 보내는 것으로 신앙교육을 다 한 것입니까? 아이들이 일주일에 교회 한번 보내는데 설교 20분 분반공부 20분입니다. 찬송과 기도 합하여 한 시간정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고 듣는 것은 무엇입니까? 집에 앉았을 때에 무엇을 보고 듣습니까? 길을 갈 때에, 누워 있을 때에도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다닙니까? 휴대폰, 스마트 폰이 나와서 텔레비전 인터넷을 부지런히 보고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교회에 보냈으니 신앙적인 교육은 다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율법처럼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치면 앉을 때나 길을 갈 때에나 누웠을 때에나 일어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시겠습니까? 그럴 부모도 없지만 그렇게 하면 자녀들이 다 도망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이 말씀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손목에 말씀을 기록한 가죽 줄을 둘둘 말았습니다. 이마에는 성경을 기록한 작은 상자를 매달았습니다. 문설주에도 붙였습니다. 회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사야 29:9-14절입니다. “봉독” 너희는 놀라고 맹인이 되어 비틀거리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선지자들의 눈을 감겼다고 합니다. 그러니 계시의 책이 봉하여진 것처럼 읽지를 못합니다. 또는 글을 몰라서 읽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계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멀리 떠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1-11절입니다. “봉독”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었습니다. 이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부정한 것을 접촉하면 몸을 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을 때 마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고 책망하십니다. 그 내용이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입니다. 4절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신명기 5:16, 출애굽기 21:17, 레위기 20:9절의 말씀을 한 절로 말씀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전통은 어떻게 왜곡하였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마땅히 드려서 유익하게 하여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부모가 우선입니까? 하나님이 우선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여야 하는 것을 하기 싫으니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7-9절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부모에게 드릴 것을 드리지 못하였다고 말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말인데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고 말로만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함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뱃속이나 채운 것입니다. 이들이 서기관들이며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들 제사장과 성전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이라고 하면서 성전에 바치면 된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전의 수입이 늘어납니다. 2주전에 보았던 말씀 마태복음 23:13-19절을 한 번 더 봅니다. “봉독” 이런 맹세들로 하여금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헌금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말로는 율법을 지키라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3-14절을 봅니다.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율법을 그렇게 잘 지킨다는 바리새들이 비웃습니다. 왜 비웃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율법을 지키자고 하면서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고 제단을 예물로 맹세하였으면 반드시 지키라고 합니다.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냅니다. 입술로만의 공경이고 속으로는 돈을 좋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고르반 사상도 처음에는 부모에게 드릴 것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도 잔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고르반 사상의 허구성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만 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자기들의 잇속을 위하여 한 말이겠지만 나중에는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사람들도 고르반이라는 말만 하고 결국은 자기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입술로만의 공경이고 그 마음은 먼 모습입니다.

 

입술로는 공경하나 마음이 먼 이런 자들이 자기 자녀들과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손목에도 매고 이마에도 부치고 언제 어디서나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의 전통을 지키며 율법만이 아니라 장로들이 결의한 전통들도 율법과 동등한 권위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공경한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까지 가로막고 있습니다. 전도하기는 하는데 배나 지옥자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싫어하고 배척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입술로만 공경하고 마음은 먼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가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면 자녀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나 잘 하세요! 나는 그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중직자의 자녀들이 제대로 믿음생활을 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들의 모습이 자녀들의 눈에는 외식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말은 하지만 말로만 하는 것을 아이들이 압니다. 이런 부모로서 아무리 가르쳐도 헛수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복음을 증거 합니까? 부모의 죄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큰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단다. 너도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란다. 이것이 주 안에서 공경 받을 부모의 모습입니다. 신명기 6:20-25절입니다. “봉독” 후일에 네 아들이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온 것과 우리 조상에게 약속한 땅에 들어와 항상 복을 누리며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의라고 하는 부모입니다.

 

에베소서 6:1절에서 주 안에서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의 부모란 어떤 사람입니까?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아 나온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주 안에서 부모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복음을 바울은 자기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말한다고 합니다(고전4:14-15). 이런 부모가 주 안의 부모이며 이런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 믿음의 자녀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안에도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