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0:22-26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2010. 9. 12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2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에게는 친히 음성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음성으로 들었을까요? 지난주일 설교 후에 곽 집사님이 십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22절 뒷부분을 보시면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해야 하는데 보았다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인 것이 시내 산의 체험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음성으로 들리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들리고 보였겠습니까? 18절입니다. “18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가 들렸고 또 번개와 산의 연기는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알아듣는 것은 모세입니다. 신약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다가 대낮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비친 것입니다. 사울과 일행이 다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만 히브리말로 들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빛만 보았다고 하고 아무 말로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행9:7,22:9,26:13-1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로서 말씀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어떻게 사람들이 감히 은이나 금으로 신상을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지어드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신을 자기의 이용물로 소유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상을 만들고 신전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형상물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나를 위하여 만드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단은 쌓게 하십니다. 단을 쌓기는 하는데 토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토단이라면 한번 쌓았다가 제물을 드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토탄은 비에도 바람에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하여 단을 쌓기는 하지만 그 단을 쌓은 것으로 인간의 솜씨를 뽐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단을 쌓고 싶다고 아무데서나 단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하여 삽니다. 자기들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교회에 나와도 자기 이름의 가치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 일환으로 교회당을 크게 짓고 멋있게 꾸미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당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교회당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안에 내 이름이 없다면 다른 곳이 어떻게 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단이 쌓아지는 곳은 하나님의 이름만 기념되어야 합니다.

 

경남 성시화 운동본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지금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고 있는데 헌금을 하면 기념관에 이름을 다 새겨준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자료를 기증하면 역시 이름들을 기록하여 주고 또 각 교회의 사진과 주보를 보내면 기념관에 새겨 준다고 합니다. 어디서 이런 일을 잘 합니까? 제 중학교 친구 중에 아버지가 주지인 사람이 있어서 한번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절에 가서 커다란 종을 보았는데 그 종에 사람의 이름이 빽빽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성주사에 가 보아도 기와불사를 하는데 기왓장을 하나 사면 자기 이름과 소원을 기왓장에 쓰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고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 토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단을 쌓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솜씨를 제단에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25절을 보시면 돌로 된 단으로 제단을 쌓아도 정으로 다듬지 말게 합니다. 자연석 그대로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정으로 돌을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돌을 정으로 다듬으면 제단도 보기가 좋을 텐데 왜 다듬지 말라고 하십니까? 사람의 솜씨가 제단에 들어가면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솜씨 발휘를 하나님은 부정하게 보십니다.

 

그러면 제단은 왜 쌓게 하십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번제는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소나 양을 잡아서 불로 태워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러면 이 소와 양이란 사람이 준비하여 드립니다. 왜 그런 제물이 불에 살라져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그러므로 불로 태워버리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 심판이 있어야 다음에 화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을 쌓게 하기고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시는 곳에 임하여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흙이나 돌로 제단을 쌓아야 하고 소나 양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면서 불에 살라지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불에 살라지는 것을 봄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인하여 용납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솜씨를 발휘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6절을 봅니다. 제단을 쌓을 때 층계로 계단을 오르지 말라고 합니다. 층계로 계단을 만든다면 제단이 아주 높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돌로서 쌓으면 제단을 높게 쌓을 수가 없는데 계단을 만든다면 다듬을 돌로 아주 높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층계를 만들어 올라가면 제물을 드리는 자의 하체가 그 위에 드러날까 한다고 합니다. 하체란 생식기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왜 하체가 들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살아야할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신을 섬기는 것은 음행과 연결이 되기에 성적인 것을 금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곳에서 인간의 하체가 들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전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인간의 생식능력 자체도 부정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를 합니다. 100일 잔치도 하고 돌잔치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레위기에서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면 부정하기에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12:1-8절입니다. “봉독” 여인이 남자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한데 월경 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 그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여자가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여 진다고 합니다. 여자를 낳으면 남자의 두 배로 정결기간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부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악 중에 잉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실 때에 할례 이후에 주십니다. 인간의 생식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봉독”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이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과 복음을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서 두 언약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인데 율법은 이스마엘이며 이는 여종의 자식입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솜씨를 발휘하여 나온 것입니다.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것이 시내 산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즉 땅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납니다. 사라의 생리가 끊어지고 나서 태어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능력으로 태어날 수가 없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고 나서 태어나는 것이 이삭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따라 태어나는 자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어머니라고 합니다. 종이냐 아들이냐의 문제입니다. 종이란 계속하여 자기 솜씨를 발휘하여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무른 솜씨를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싫어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합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으로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계속하여 사람들의 솜씨 발휘를 요구합니다. 전도의 솜씨를 발휘하라고 합니다. 성전을 아름답게 짓자고 합니다. 세계선교를 우리가 담당하자고 합니다. 구역을 활성화 시키자고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온갖 인간의 노력과 기술과 땀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런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죽어서도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느 부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다 줍니다. 아들은 허랑방탕하며 창기와 어울려 재산을 다 말아먹어 버립니다. 마침 그곳에 기근이 일어나서 취직할 곳도 없습니다. 돼지 치는 곳에 취직하여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주는 자가 없습니다. 그때 이 아들이 자신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들의 자격이 없지만 자기 아버지 집의 종들도 배부르게 먹는데 그저 종의 하나라도 여겨달라고 하려고 아버지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잃었다가 찾은 자라고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자라고 하면서 목욕시키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들의 반지를 끼워줍니다. 그러자 누가 삐집니까?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순종하고 법을 지키고 종일 일하고 왔던 큰 아들이 이런 소식을 듣고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 오히려 종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허랑방탕하여야 아들이 된다는 말이냐고 항의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언제 그렇게 살지 않은 적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사람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나 신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하여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도 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나를 위하여 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무명으로 헌금을 많이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견해 보이며 보람된 기분인지 해보는 사람들은 압니다. 안 해보니 잘 모르지요! 그래서 더욱 그런 일에 몰입을 합니다. 이것도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든 종이든 다들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들은 자기 솜씨를 발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종은 부지런히 자기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솜씨를 발휘하여도 이스마엘처럼 쫓겨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여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쫓겨나가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자신은 아들이라 대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솜씨 발휘는커녕 자신이 행한 것이 죄 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하나님은 아들로 받아주십니다. 이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복이 주어집니까? 24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사람의 솜씨 발휘가 없는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로 인하여 복이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번제와 화목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복이 주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