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으로 설교 앞부분 5분정도 녹화 못했습니다]

 [음성 설교]

출애굽기 20:13 살인하지 말라 2010. 8. 1

 

오늘 본문은 살인하지 말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사람이 살인을 하면 안 되지! 사람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데! 그렇게 긍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명이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에게 무엇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까? 인간에게 살인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해의지가 없다면 이런 말씀은 성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도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악한 마음은 품지 않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할 수가 있느냐고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짐승이 들으면 화를 낼 말이지만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살인자의 상황과 그 마음이 된다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서 살인하지 아니할 뿐입니다.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는 일에 하나가 되었기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납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만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로 인간은 착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모든 만물이 다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면 선이라고 여깁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악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나를 위하여 만물이 있어야 선이라고 여기는 악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1-8절입니다. “봉독”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자기의 수확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자신이 동생도 아니고 형인데 왜 자기의 것을 받지 않고 동생의 것을 받느냐는 이 분노가 동생을 살해하는 동기기 됩니다. 이것이 과연 동생을 죽일 정도의 분노입니까?

 

살인에는 분노로 살인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수리 할 때에 철물점 아저씨가 말하는데 사파동의 어느 아주머니가 보험금을 타서 혼자 써버린 모양입니다. 남편이 화가 나서 아내를 죽였다고 합니다. 목사가 화가 나서 자기 아내를 죽이고 토막을 냈다는 이야기는 벌써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고 또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원인은 분노입니다. 우리도 분노가 일어나면 얼마든지 살인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인도 분노로 동생을 살해합니다.

 

6-8절을 보시면 네가 분하여 안색이 변함이 어찌 됨이냐고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 죄란 동생을 살해하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그의 분노는 그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가 없어서 동생을 들로 나가자고 하고서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동생을 평소에 죽일 마음을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시는 것에 대한 분노가 동생을 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위하지 않는 방해요소는 다 죽이겠다는 살해의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최초의 살인이라면 이런 모습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부모님이 여러 자녀 중에 한 자녀를 편애하면 사랑을 받지 못한 형제들이 사랑을 받는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이런 일들이 야곱의 아들들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시면 야곱이 노년에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요셉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다른 형들과 달리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형들의 심사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밉게도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칩니다.

 

이런 미운 털이 박힌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밭의 곡식 단들이 있는데 자기 곡식 단에 절하더라고 합니다. 더욱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까지 요셉에게 절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미움을 받습니다. 이 요셉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을 찾아 왔을 때에 형들이 꿈꾸는 자가 왔다고 하면서 그를 죽여서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면서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져 버리자고 합니다.

 

그때 르우벤은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에만 던지자고 합니다. 나중에 살려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였을까요? 동생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자기가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서모를 범하였기에 이번 기회로 아버지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동생 사랑이 아니라 거저 동생을 살려서 아버지의 환심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마저 박탈당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국 요셉의 꿈대로 됩니다. 그러면 요셉의 형들을 요셉을 죽인 것과 다름이 없는데 왜 용서를 해 줍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마태복음 5:21-26절을 봅니다. “봉독”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라는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입니다(히3:5-6).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살인하면 심판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살인하지 않아도 노하기만 하여도 심판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본 살인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분노입니다.

 

왜 나는 사랑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사랑받느냐는 분노입니다. 나는 택함을 입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택함을 받느냐는 분노입니다. 나는 왜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부요한 집에 태어났느냐는 분노입니다. 왜 똑같이 입사하여 어떤 사람은 빨리 승진하고 나는 승진하지 못하냐는 분노입니다. 왜 똑 같이 교회 개척하였는데 어느 교회는 부흥하는데 내가 한 곳은 이러냐합니다. 이런 분노들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면 연쇄 살인범이 되고 그 정도가 약하면 새 차에 못으로 찍찍 긁어 놓고, 타이어에 펑크를 내고,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분노한 것은 이미 살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심지어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하면 라가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평범한 욕설입니다. 그런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분노 정도가 아니라 형제에게 욕 한마디 하여도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았다고 안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욕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겉으로 안 해도 속으로 얼마나 많이 분노하였습니까? 하나라도 해결하지 아니하면 옥에서 풀려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 지옥 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가인이나 야곱의 형들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들을 다 죽이자는 것입니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감히 잡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인 정도가 아니라 욕을 해도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주도가 되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렇게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을 지키는 착한 사람들입니다. 평소에 사람을 죽일 마음을 품고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 그들 속에 들어있는 살해의지가 막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영화중에 하나가 ‘구타유발자들’입니다. 저도 보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절반쯤만 보았습니다. 어릴 때에 때린 사람은 경찰이 되어있고 맞은 자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가 경찰의 동생을 구타하고 경찰은 다시 그들을 구타하고 여기에 대학교수가 벤츠타고 여 제자를 태워서 나쁜 짓 하려고 왔다가 얽히고 해서 영화 내내 구타가 만발하는 참 불편한 영화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영화 제목이 생각이 나면서 예수님이 살해 유발자라는 불경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살해할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20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예수님이 인정하십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의가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의롭다는 인간의 의의 수준이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면 인간으로서 가장 의롭다는 자들에게 살해의지가 마구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에 가인에게 살해를 당한 것은 모델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체는 유일하게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3:17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을 향한 하늘의 음성입니다.

 

이렇게 사랑받으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싫어합니까? 지상에서 가장 의롭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평소에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공모하고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과 말씀을 보고 들으니 속에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아벨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아벨을 죽인 자의 편에 서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마태복음 12:10-14절입니다. “봉독” 2주 전에 안식에 대한 말씀을 다 드리지 못하였는데 서울 하나교회에서 두 시간이라서 전체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본문도 안식일에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느냐고 합니다.

 

구덩이에서 양을 구하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양을 구하려고 안식일에 일하면서 양보다 귀한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얼마나 옳으냐며 공개적으로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 손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과 행위는 완벽합니다. 어떤 논리로도 성경의 전체의미로도 바른 말씀과 해석과 행위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14절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합니다. 마가복음 11:15-1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십니다. 그러자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합니다. 결국은 이들이 헤롯당과 작당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인간 속에 살인의지가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단순한 한 인간을 살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 아들이란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여기에 공모한 자들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모든 인류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분노한 것이, 형제에 대하여 욕을 한 것이, 형제를 미워한 것이 다 살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여 미워하지 않겠다고 참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미워함이 그 분노가 그 욕설이 예수님을 살해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을 사도행전 20:28절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을 살해하였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살려주셨다는 고백이 있는 자들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