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22~26 무엇이 보이느냐? 2019. 4. 28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지난주의 말씀은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바리새인의 누룩과 정치적인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먹고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몇 광주리 남았으며 칠병이삼어의 기적으로 몇 광주리 남았느냐고 물으신 후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조차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으로 오염이 되어 있기에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제대로 모르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합니다. 누룩에 대한 말씀은 배 안에서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눈이 뜨이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직도 깨달음이 없느냐고 하신 후에 배가 벳새다에 이르자 그곳의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합니다. 오늘 본문의 맹인이 눈 뜨는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눈 뜨지 못한 것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도 결국은 눈을 뜨게 하여 주시겠다는 주님의 일하심이 중첩되어 있는 사건이 됩니다.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여기서는 수많은 무리가 나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맹인을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러면 무리를 따돌리기 위하여 마을 밖으로 나가신 것은 아닙니다.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에서 마을 밖으로 나가시면 더 많은 무리가 따라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신 행동은 다른 뜻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건은 뜻이 있습니다.

 

이사야 42:16~17절입니다. “16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17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여호와의 구원을 맹인들을 지름길로 인도하여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여전히 맹인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2:18~20절입니다. “18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19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이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맹인이기에 많은 것을 보아도 유의하지 않고 귀가 열려 있어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맹인을 이끌고 나가셔서 암흑이 광명이 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2절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여호와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지만 그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고 오듯이 그렇게 인도하여 내었지만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33~34절입니다.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며 새 언약이 체결되면 그 죄를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봅니다.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으신데 일부러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침을 뱉어 안수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는 것처럼 새로운 창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24~26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24 그러자 그는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예수께서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시자 눈이 밝아지고 완전히 성해져서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는 "저 마을로는 돌아가지 말아라" 하시며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신데 맹인을 눈 뜨게 하시는데 두 번이나 안수를 하셔야 됩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처음에 눈에 침을 뱉어 안수하심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흐릿하여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시니 다시 안수하여 분명하게 보도록 해 주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보지 못함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모든 유대인들처럼 종교적인 메시아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볼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표적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메시아를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정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혁명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오셨는지 알지 못하기에 아직은 맹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기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그 일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지지난주 인천에서 어느 자매가 왔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앉아 말씀을 듣는데 한 자매가 말씀을 잘 듣기는 하는데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고 나오면서 잠시 인사를 하는데 옆에 있는 분이 이 분에 대하여 말하기를 20대에 중도 실명을 하였는데 지금은 같이 설교를 듣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손을 잡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매가 저를 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다고 하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복음을 믿은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벧전1:9). 그런데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예정된 은혜로 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뜻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무슨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며 이러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의 내용이 생명과 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 믿음이라고 말을 하는데 그 내용은 생명도 아니고 썩어질 것들이라면 아직 이 사람은 맹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아직 눈을 뜨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곧 그들의 사상과 교훈을 주의하라고 하시는데 그들은 먹는 떡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제자들은 맹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이끌어내셔서 두 번이나 안수하시면서 분명하게 보게 하여 주시듯이 제자들도 무엇을 보고 믿고 따라야 할지를 알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한꺼번에 다 알지 못하여도 괜찮은 겁니다.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졌지만 이 역사 속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22절입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형제에 대하여 일곱 번이나 용서 하려는 그 마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는 누구나 예수님께 영원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 완전함을 일흔 번이라도 하라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용서 받아 구원 받으며 그 용서는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마태복음 26:26~28절입니다.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아 애굽에서 손을 잡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몸은 딸려 나왔지만 마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말씀하셨는데 그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만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기억조차 아니 하시는 새 언약의 피가 됩니다. 이 언약을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드디어 눈을 뜨게 됩니다.

 

사도행전 7:55~60절입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이를 갑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아들이 하늘이 열리는 것이 무어냐고 물었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것을 본다고 하자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스데반은 눈을 뜨인 자이고 돌을 치는 자들이 맹인입니다. 이 돌을 던지는 자들 중에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안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자 사울이 눈이 멀었다가 삼일 만에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모세의 수건이 벗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합니다.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2:7~10절입니다.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시편 8편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큰소리치면서 세상의 보이는 것과 썩을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만물이 복종한 것을 말씀을 통하여 눈에 보듯이 믿고 살아갑니다. 이들이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의 시각이며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시각입니다. 오늘 우리도 눈이 뜨여져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이 밝히 보이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시각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