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27~38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19. 5. 5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눈 뜨게 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향하여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면 바다가 잠잠해 집니다.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맹인을 눈 뜨게 하시는데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손으로 안수하셔서 기도하시는데도 한 번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셔서 분명하게 보게 하십니다. 이 내용은 무려 3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들이 아직 영적인 맹인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이런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셔서 십자가를 알게 하십니다.

 

본문 27절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십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갈릴리 호수 북쪽 헤르몬산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곳은 요단강의 주요 발원지이며 이 물이 흘러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므낫세 반 지파가 차지하지만 우상숭배를 함으로 앗수르에 의하여 흩어져 버린 곳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 살지 않는 곳이며 헤롯 빌립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어떤 메시아인지를 말씀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27~28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다니시면서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그동안 갈릴리 호수 주변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헤르몬산 가까운 곳이니 걸어 다니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시는 길입니까? 이스라엘 북쪽 끝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차지하려고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곳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도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받고서는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6:14).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리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4:5).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약속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기에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29~3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어떤 분은 자기 남편이 믿는 하나님이 싫어서 교회 오기도 싫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러면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저는 기억에도 없는데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생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인 누구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믿고 아는 예수가 누구십니까?

 

이 질문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17:3).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면 우리는 우리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8:24). 그러므로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신 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상상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행본문인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은 너의 혈과 육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말리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그리스도라는 신앙의 고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고 하시지만 아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이 밝아지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 31~33절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씀은 그때에 처음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으실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약 3년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후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고난 받고 버림받아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려고 비로소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한 것이 유대인들이었으며 제자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증거 한 세례 요한조차도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오실 그리스도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정도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종교적이며 정치적이며 현 세상의 구원을 주는 메시아로 기대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抗辯)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버림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이런 메시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과 사람이 한 통속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란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입니다. 누룩이 무언지 물어본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부풀게 하는 이스트 곧 효모(酵母)입니다. 이것이 들어가야 빵이 맛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룩이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떡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이 누룩이 들어간 증거입니다. 어떤 누룩들이 들어가 있습니까? 종교적인 기적을 일으켜 주는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부자 되게 하여 주는 메시아, 건강하게 해 주는 메시아, 교회 부흥시켜 주는 메시아, 표적과 기적을 행하게 하는 메시아, 모든 문제 해결하여주는 메시아, 위로 해주는 메시아, 이런 것들이 전부 누룩이 들어간 메시아니즘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하였지만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단지 메시아 은닉(隱匿)만이 아닙니다. 그런 메시아를 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된 메시아는 십자가를 지신 메시아입니다.

 

본문 34~35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을 따라 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부인이나 자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네가 원하는 메시아사상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였습니다. 시간도 내어야 하고 돈도 내야 합니다. 멀리 여수서 오려면 왕복 교통비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긍정입니다. 내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주를 위하여 헌신충성봉사 하였으니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큰 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기부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나를 결코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인생이 평생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도 타락한 죄인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살리려고 가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나를 살리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생존은 당연히 나의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문제도 나의 생명을 살리려고 교회도 다니고 예수님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때에 죽기 위하여 따라갑니까? 살기 위하여 따라갑니까? 살려고 간다면 죽는 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을 금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의 충성은 고진감래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는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니 그럴 수 없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의 혈과 육으로 생각한 그런 메시아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권위마저도 포기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이 와서 말하니 그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자기 종으로 삼습니다. 내 말 아니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세뇌가 되면 재산 바치고 몸 바치고 뺨을 맞아도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며 사탄의 생각입니다.

 

본문 36~37절입니다. “봉독 사람이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얻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온 힘을 다하여 세상의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서 내 영혼아 평안이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부요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영혼을 오늘 밤에 도로 찾으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본문 3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죽는 메시아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는 저주 받아 죽는 죽음이기에 거리끼는 것이며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에게 물어보면 백인백색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한 자들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다 이루심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더 원할 것이 없다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만족합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전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모든 것을 가져도 그것은 결국 불에 탈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면 그것이 죄 가운데 죽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평생의 소원은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