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3:10-13 안식(安息) 2010. 11. 21


10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11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13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오늘 말씀은 안식년과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거룩한 사람에 대하여 보면서 안식에 대하여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안식에 대하여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년이 먼저인데 성경의 순서는 안식일부터입니다. 우선 안식일을 봅니다. 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까? 최초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면서 7일째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면서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깨어지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안식이 깨어진 것입니다.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길 정도로 유혹을 받고 나서 본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였습니다. 그 유혹의 근원은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이 지금도 인간들에게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죽어도 한번 이루어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초개처럼 여기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함으로 그 사람은 신화로 남고 싶은 것입니다. 죽는 것 보다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더 고통스럽기에 유명인 여기면면 악명이라도 자 것입이름을 남겨서 신의 자리에 이르고 싶은 것입니다. 아시안 게임을 보면 누가 더 신화를 창조하느냐것입이야기입니다. 이런 인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한다고 하여도 더 높은 목표를 향하여 쉬는 것이기에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들은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쓰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이 나야하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까? 율법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지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창조와 구원이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일하지 아니함을 통하여 기억하여야 하는 것이 범죄 이후의 안식일 지킴의 뜻입니다. 집안의 종이나 짐승조차 한숨 돌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봅니다. 엿새 동안은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고 합니다. 그렇게 쉬어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렇게 주인이 쉬어야 소와 나귀가 쉽니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게 됩니다. 나그네란 떠돌이 고용인이겠지요! 이들이 주인의 쉼을 통하여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安息)이란 말 자체가 편안한 숨입니다. 평안하게 숨을 한번 쉬는 것이 안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식이 왜 없다고 하였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니 쉼이 없습니다. 신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전지전능합니다. 이런 신을 따라 잡으려면 어떻게 쉴 수가 있습니까? 회사의 사장이라면 직원을 쉬게 합니까? 모 집사가 현대 자동차 하청공장에 3개월 계약직으로 일을 하는데 일감이 많으니 주일도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수출이 잘 되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현대자동차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일요일 쉬게 하겠습니까? 현대자동차가 망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계속 될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도 다 좋아할 것입니다. 부정축재를 하여 감옥에 가도 금방 풀려납니다. 신이 되려고 하는데 막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회사에서 주일에 예배드리러 가야한다고 하면 회사 그만두라고 합니다. 그러니 회사가 망하든지 수출이 안 되든지 하기 전에는 쉼이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쉼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제로 쉬게 하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주일 입원을 하고 있는데 쉬기 싫어도 쉬어야 합니다.


회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에 쉼이 있습니까? 남편이 만년 말단 직원에 승진도 못하고 따라서 월급도 많이 못 받아오는데 그래도 감사가 나오십니까? 자녀의 성적에 만족하시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허수아비 춤’이라는 소설을 보면 연봉 10억 받는 대기업 임원이 대형프로젝트에 성공하였다고 스톡옵션으로 30억을 받아 아내에게 갖다 줍니다. 그때 아내가 하는 말이 그 회사 회장님이 하나님이라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행복을 주는 회장님께 더욱 충성하라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이런 욕망을 가진 우리가 교회로 모여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주여 지금 사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내 안에 사는 분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나 소원이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안식에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가 없지요!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목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복을 받으려면 더욱더 교회에 충성을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 더 무거운 짐을 지워줍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열심히 충성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해서 입니까? 자신의 욕망입니까? 어느 집사님이 그러셨어요!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고백하고서는 그런데 예수님이 이게 거짓말인줄 아시지요! 자기 욕망이 아니래도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있는 노새처럼 목사의 말이 진리가 아니라 목사의 야망임을 눈치 채면서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가지고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고린도전서 9:24-25절입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아시안 게임이든 올림픽이든 그런 메달은 다 썩을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하여 달려야 하는데 더욱 열심을 내라고 독촉하는 구절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로 앞의 23절 말씀을 보면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세상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분별하며 목표를 똑 바로 보고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질서를 전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 됨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은 자신이 죽기 위하여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자신의 신화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른 표적도 능력도 없이 비참하게 저주받아 죽은 십자가의 길로 가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달려갈 길을 가고 있도록 하는 것이지 교회의 성장이나 자신의 세상의 성공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제도 오늘도 쉼이 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주일에 하루 쉬는 안식일마저 중노동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안식년을 쉴 수가 있습니까? 10-11절을 봅니다. 6년 동안 농사짓고 7년째는 땅을 묵혀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이나 감람원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가꾸지 않고서도 나오는 곡식이나 열매들은 누가 먹을 수 있습니까? 가난한 자들과 짐승들입니다. 가난한 자와 짐승들까지 돌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안식이 무엇임을 보여줍니다.


안식일과 안식년만이 아니라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후에는 희년이 있습니다. 이 희년은 모든 것들이 다 회복되도록 합니다. 종으로 팔린 자라도 돌아옵니다. 땅이 팔린 것도 원 주인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과 기쁨과 안식이 주어지는 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안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율법의 문자만 보았지 그 뜻을 몰랐습니다. 안식년은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땅이 안식하였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안식년을 지키자는 결의는 하였는데 정말 지켰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완성하실 분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 이사야 61: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십니다. 그런데 은혜의 해까지만 읽으십니다. 보복의 날은 그대로 두시고서 이 말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네가 요셉의 아들인데 무슨 수로 이 말씀을 이루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참된 안식을 주시려고 오신 분을 죽이려고 하여 실제로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행위로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만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을 주셔야만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안식을 명하시고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안식을 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고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안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61장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에서 깨어진 안식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다 이루었다는 증거가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안식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동안은 아주 부분적으로 순간적으로 맛을 보는 것입니다. 전에 예로 말씀드린 것처럼 물질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수면위로 올라와서 숨을 한번 쉬어야 하듯이 우리가 이렇게 예배 하는 시간에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안식을 맛을 봅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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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12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안식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오직 선물로 주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모형이고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맛 본 자는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힘이 들고 수고하는 것은 살기위한 것이니 힘이 듭니다. 시편 90편 말씀대로 일평생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는 수고와 슬픔뿐이기에 힘이 듭니다. 이런 인생들이 숨이라도 한 번 편하게 쉬는 것이 안식입니다. 고 장주미집사가 숨 한번 쉴 때 마다 고통 하는 것을 보고 빨리 안식을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돌아가실 때에 숨 한번 크게 쉬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이 땅에서 살려고 버둥거리며 숨 쉬는 것이 다 고통의 숨결입니다. 이런 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 안에서 숨 한번 크게 쉬는 예배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