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5:31-40 등잔대(燈盞臺) 2011. 1. 23

 

31 너는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32 가지 여섯을 등잔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다른 세 가지는 이쪽으로 나오고 다른 세 가지는 저쪽으로 나오게 하며 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34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5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며 또 두 가지 아래에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결하게 하고 36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37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38 그 불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39 등잔대와 이 모든 기구를 순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성막의 겉모양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몇 겹의 덮개를 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안은 화려하게 수놓은 천으로 되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창이 없기에 불빛이 없으면 늘 캄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보시면 등잔대를 만들라고 하시는데 금 한 달란트로 쳐서 만듭니다. 쳐서 만드는 것은 은이나 놋을 쳐서 만드는 것을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은덩어리를 망치로 두드리면서 펴고 늘이면서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둥좌우로 3개씩 등잔을 만들기에 일곱 개의 등잔이 됩니다. 한 덩어리로 된 금으로 일곱 등잔을 만든 것입니다. 등잔의 받침은 살구꽃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등잔대에 24시간 등불을 켜도록 합니다. 레위기 24:1-4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 지며 3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4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 등불을 켜는 재료는 감람열매를 찧어낸 기름입니다. 올리브기름입니다.

 

이러한 등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사무엘상 3:1-4절에서 봅니다.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란 영적으로 어두움의 시대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림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사울을 버림을 받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을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십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성전을 위하여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을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은 모세의 성막보다 그 크기가 배로 넓어집니다. 이 건물 성전에는 등잔대가 10개가 들어갑니다. 성소 좌우편에 다섯 개씩 금으로 된 등잔대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우상숭배로 더렵혀지기 시작합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솔로몬 사후에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북 이스라엘은 단과 벧엘에 신전을 만들고 그 안에서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경배합니다. 이런 북 이스라엘은 먼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이란 주변의 이방신들입니다. 종교적인 제의로 신에게 정성을 바치면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신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도 섬깁니다. 이런 모습이 혼합되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은 모습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에 망하는 것을 보면 남 유다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유다도 바벨론에 의하여 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성전안의 등불도 꺼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등불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대로 꺼지고 마는 것입니까? 스가랴 4:1-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예언한대로 바벨론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치자 공사를 중단한 때 약 15년이 지납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이 성전의 완성과 그 안의 등잔대를 보게 합니다. 이 등잔대는 모세가 보고 만든 것과 조금 다릅니다. 스가랴가 본 등잔대는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하지만 등잔대에 기름주발에 관이 연결되어 있고 그 등잔대 좌우에 감람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그곳에서 기름이 나와서 등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천사에게 묻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성전이 지금 초라하게 보여도 반드시 완성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조롱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는데 이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입니다. 왕과 제사장을 뜻합니다.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예수님이 담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등잔대도 역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6절입니다. “봉독” 태초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기에 이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이며 빛입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람들의 생명이며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어두움에 비쳤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은 어두움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죽음이며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빛이 세상에 비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 땅에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란 사람들이 이미 죽은 자요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와 사망의 종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빛에 대하여 증거 하여도 그 빛을 영접할 자가 없었습니다.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누구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됩니다. 그래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야만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들 자신은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선악을 분별한다고 합니다. 어두움과 빛을 구별한다고 합니다. 윤리와 도덕과 법을 만들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합니다. 이들보다 더욱 옳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조차 생명이며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여 십자가에 죽여 버렸습니다. 이로서 온 세상이 사망과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2:1-14절을 봅니다. “봉독” 왜 바울사도가 전도할 때에 수사적인 아름다운 말과 지혜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 알고 전하려고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나타남에 있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이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성전이 완성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자기 백성에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감추어져 있었기에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알게 하시는데 육의 사람은 이 성령의 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1:12-13절입니다.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일곱 금 촛대가 보이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보입니다. 그러면 이 인자는 예수님이고 촛대는 무엇이겠습니까? 20절입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약의 등잔대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등잔대는 하나의 금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기둥이 예수님이라면 그 기둥에 붙어있는 등잔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7:1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0:16절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린도 전서 12:27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또한 골로새서 1:18절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교회가 일곱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들고 계시는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그 몸을 돌보고 계십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몸은 머리이신 예수님께만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요 빛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니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보다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4:4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 가려지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이 되신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비취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등잔대로 시작하여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며 내려온 결과가 예수님이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의 광채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는 것은 세상신이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시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고 하신 그 태초에 창조의 말씀의 능력이 어두움에 갇힌 우리에게 복음의 광채를 비쳐주신 것입니다. 이 보배를 우리가 질그릇에 담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치란 보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광채가 비쳐지고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14-18절을 함께 봉독합니다.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오늘 우리가 바라보며 달려가는 길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이름도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영광을 따라가는 일에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라면 썩어지고 낡아지는 겉 사람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십니다. 빛이 비춰지면 속사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조치를 하시는데 그것이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비교하면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중에 영원한 영광의 소망이 더욱 분명하여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