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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4-6 첫째 부활 둘째 사망 2010. 3. 7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사람들은 다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어떤 복을 좋아합니까? 저 사람은 참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가정을 꾸리며 좋은 자녀를 낳고 행복하고 여유 있게 살다가 평안한 죽음을 맞으면 그런 삶을 복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가난한 나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교육도 못 받고 가난하게 살다가 병들고 고생하다가 죽으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 순전히 인간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6절에 보니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복을 받은 것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룩한 복인 것입니다. 거룩한 복이라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고 하니 이런 복도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느냐고 그 비결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나 결단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죽었다는 사실만 더 부각될 뿐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복 중에 하나로 여기는 것이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미 죽어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능이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 이전에 은혜로 구원을 얻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먼저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율법을 주시는 것은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 복을 받거나 영생을 얻을 수가 없음을 보여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복을 받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자기들은 살아있는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런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율법 조문에도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가르치고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생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경이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증거 한다고 한 것입니다(요5:39).

 

그렇다면 영생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 소관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며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성경 박사들이 대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너는 어느 신학교 출신이며 어느 문하생이냐고 따지면서 그를 배척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모든 사람을 적극적으로 죄 아래 가두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자기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세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온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 바로 선악과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5:21-29절입니다. “봉독” 이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고침 받은 사람이 자기자리를 들고 가다가 바리새인들에게 걸린 것입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합니다. 나를 고쳐준 분이 들고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안식일만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하기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죽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권세도 아 아들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사망에게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지금 사망에 있다가 생명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사망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살아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때로부터 듣는 자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어떻게 듣겠습니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도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지금 죽어 있거나 살아있거나 간에 이미 산자라는 것입니다.

 

26절과 27절도 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나는 것이기에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자는 지금 펄펄 살아있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자는 살아난 자이지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3:18).

 

28절과 29절을 봅니다. 이런 말씀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죽어 있는 자들 즉 무덤에 있는 자들도 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한 분은 한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이 선한 것입니다. 이 선한 일의 결과가 덮쳐온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이미 현재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일과 재림 때의 부활하는 일을 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한번 태어나는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는 사람은 한번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번 태어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는 것을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 그러니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임하여 두 번 태어나는 사람이 첫째 부활에 참여되었기에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4절을 봅니다. 보좌를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순교당한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나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다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9-10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자들이 새 노래를 부르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시고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서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초림부터 재림까지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괄호부분이 나옵니다. 괄호가 나오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없는 경우에 이렇게 표시를 합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 괄호부분을 보면 죽은 자들이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 천년설 주의자들이 이런 말씀에 난점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천년 동안 왕 노릇하려면 천년 동안 다 죽어있는데 어디서 왕 노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천년이 차기 까지 살지 못한다는 것은 초림부터 재림까지 예수님을 음성을 듣지 못하여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괄호밖에 말씀에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살아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자들은 더 엄격히 말하면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상하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리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따도 죽은 자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죽어 있는 자입니다. 지방선거가 있으니 벌떼같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란 자기희생으로 백성을 살리는 역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이 이러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16절입니다. “봉독”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곳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나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데 그리스도의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맡아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맡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이라는 것이 사망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짜 복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이야기인데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는 이야기를 하니 핍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자는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는 것은 많고 감사와 환영을 받는 것은 적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된 자들의 복인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 첫 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합니다. 왜 복이 있는 자들입니까?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둘째 사망의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 사망이 무엇입니까? 20:13-15절을 봅니다. “봉독” 모든 죽은 자가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벨론의 영광이 헛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