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2:16-20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2010. 10. 31

 

16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17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18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19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을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와 우상숭배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첫째, 16-17절입니다.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다면 납폐(納幣)금을 주고 아내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녀의 아버지가 그 딸을 그에게 주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내라고 합니다. 납폐란 말을 요즈음 잘 쓰지 않는데 예물로 바치는 것을 납폐라고 합니다. 신명기에서 이 신부의 몸값을 은 50세겔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왜 율법으로 나오는 것입니까? 남자가 처녀를 좋아해서 꾀어 동침하면 반드시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 때는 결혼이라는 것이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래의도하신 결혼제도입니다. 말라기 1:15절입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을 취하는 것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나 인간의 역사를 보면 범죄이후에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으로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무엘하 13장에서 봅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배다른 형제 다말을 사랑하여 병이 났습니다. 처녀이기에 어떻게 하지 못하여 끙끙거리고 있는데 간교한 사촌 요나답이 여자를 취할 방법을 알려줍니다. 암몬이 아픈 척 누워있자 다윗 왕이 찾아옵니다. 왕에게 요청을 하여 다말로 과자를 구워달라고 합니다. 왕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 합니다. 다말이 과자를 만들어 오자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강간을 합니다. 강간 후에 처음에 사랑하였던 것 보다 더욱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다말을 범하기 전에는 다말로 인하여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취하고보니 사랑한다고 할 때보다 더한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들을 이런 말씀들을 잘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욕정에 눈이 멀어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오빠 못 믿어? 손만 잡고 잘게! 도둑놈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기회조차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암논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온갖 너절한 사랑이야기가 다 쏟아지지만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 욕정에 잡혀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정욕으로 처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처녀를 범하였다면 그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사람들을 구경하러 갔다가 하몰의 아들인 추장 세겜이 디나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강간을 합니다. 그런데 세겜은 강제로 욕을 보이고 난 후에도 디나를 깊이 연연하여 디나를 위로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아내를 삼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몰이 야곱에게 와서 자기 아들의 아내로 준다면 어떤 혼수라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이 말을 듣고 할례를 행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합니다. 그 부족이 할례를 행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3일 째에 레위와 시므온이 그들을 공격하여 남자들을 다 죽이고 다른 형제들도 함께 노략하였습니다. 할례언약을 이용하여 속이고 죽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방인들보다 이스라엘 족속이 더 악한 것을 봅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나 야곱의 아들들의 모습들이 이방인보다 더 악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나라사람들 보다 착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로 삼은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을 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난 아내를 데리고 와서 다시 살면 남편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부정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하시면서 바람난 아내를 다시 데리고 와서 진실함으로 장가드는 다는 것이 호세아서의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새 언약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 정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이란 자기희생 즉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 참 사랑입니다.

 

둘째, 18-20절입니다. 무당을 살려두지 말고 수간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멸하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상숭배와 연결이 됩니다.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는 말씀은 나중에 보고 짐승과 음행하는 것을 먼저 보겠습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변태적인 성행위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뒤틀린 성욕들이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봅니다. 이런 수간(獸姦)은 가나안의 풍습에서 신에게 제사하는 모습이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니 이것도 무당과 같이 우상숭배의 일종이기에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당이나 수간이나 간에 이런 것이 바로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기에 살려두지 말고 반드시 죽이고 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무당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무당이 접촉하는 신이 귀신입니다. 그러므로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답하니 찾아갑니다. 현재 일이 풀리지 않고 답답하고 장래에 어떻게 될지가 답답합니다. 궁중사극들을 보면 무당이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정적의 아들을 죽이기 위하여 굿을 합니다. 상대를 해쳐서라도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이런 욕망을 무당이 이루어주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무당이란 꼭 대나무 깃발을 세워두고 굿이나 하는 그런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수수료 챙기겠다고 하는 자들이 다 무당입니다. 그러니 절도 무당이고 교회도 무당들이 설칩니다. 복채를 많이 내어야 잘 빌어주겠다는 것이 무당이 하는 짓입니다. 복채를 많이 내면 아무리 삼재(三災)가 있어도 다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무당이 가득한 사회라면 결코 공정한 사회가 되지 못합니다. 돈만 많이 바치면 재앙을 멀리하게 하고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합니다. 이런 무당들을 가나안 땅에서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이 섬기는 것이 귀신이며 결국 여호와를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위하여 비텐베르크 성당의 출입문에 95개의 선언문으로 자신의 논지를 밝혔습니다. 젊은 신학자 루터가 이 선언문을 붙일 때만 해도 종교개혁이 이렇게까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로마교회가 너무 성경과 다르게 나가는 것에 대하여 토론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오늘날의 개신교가 태동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을 하면서 무엇을 개혁하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하였는데 종교개혁과 비추어 무당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보려고 합니다. 무당이란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무당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합니다. 중세시대에 성직자 계급은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성경은 교황과 신부들만 보았습니다. 일반 신도들은 성경을 구할 수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가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인간의 행위가 없으면 구원이 안 되는 식으로 전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 대 성당을 짓는 돈을 더 모으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만큼 죽은 조상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온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말을 하여도 교인들이 따라간 것은 무지하였습니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신의 매개자라는 성직자들만 눈에 보이니 이들의 말을 신의 말처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만민제사장설을 루터가 주장하였습니다.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다 있는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2: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특별한 신분이나 계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를 말합니다. 모든 성도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마치 자기들이 신과 인간의 대리인양 생각한다면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5절입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민 구원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특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하는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한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랑의 중보자도 한 분이신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찬탈하고 나선 자들이 성직자라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교리로 문답하는 자료가 웨스트민스터 교리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6조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을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적 근거가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권리침범이다.”

 

이렇게 분명한 신앙고백을 기초로 개신교가 세워졌는데 왜 교회 안에 무당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무당을 존경은 하지 않아도 두려워는 하였습니다. 신의 매개자로 복과 저주를 주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사가 이런 무당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목사들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핑계되겠습니까? 이런 무당이 많이 나와서 설치고 있는 것은 민중들의 종교성 때문입니다. 당근과 채찍, 축복과 저주를 휘두르는 무당들을 교회에서 보게 되는 현실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한 모습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는 교회라면 이런 무당을 살려두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여러분의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2:2절입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참아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 더욱 깊고 넓게 알아감으로 무당을 살려두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