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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6:1-7 의로우신 심판 2009. 11. 29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18장에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해결 받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과부가 자기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자주 와서 간청을 합니다. 이 재판관이 내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니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이어서 나옵니다.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밤낮 부르짖으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하면서 자기의 소원을 열심히 아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런 부르짖는 믿음을 예수님이 오실 때에 세상에서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르짖음은 나의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고생하고 남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던 그런 억울함의 호소가 아닙니다. 남들은 다 건강하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약하고 병들어 고생하느냐는 이런 원한도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부모 탓이요 조상 탓이요 결국 하나님 탓이라고 돌리면서 세상과 하늘을 향하여 이를 갈면서 사는 그런 원한이 아닙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모든 선과 악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순교당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봉독”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무엇을 싫어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싫은지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 말씀을 사람들이 싫다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들도 핍박과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오셨다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소식을 증거 하는 자들을 또 죽인 것이 이 땅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째 인에서 순교자들이 자기들의 피를 신원하여 달라고 한 후에 여섯째 인을 떼시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12-17절을 봅니다. “봉독” 이런 재앙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입니다. 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설 것이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곱 인은 경고입니다. 그러니 이제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은 경고가 아니라 최종 심판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가득하게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 진노가 무엇입니까? 6절을 봅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피를 흘린 곳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이 문제가 있는 땅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창세기 4장부터 의인을 피를 흘린 땅이라는 것입니다.

수요일 신명기를 마치고 기도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첫 내용이 피의 호소였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기도하자는 말도 있고 하여 수요일 시간을 늦추면 직장인들도 올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을 하였는데 기도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처음에는 몇 사람 더 오다가 지금은 시간 바꾸기 전이나 같이 되어버렸는데 이제는 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올 사람 올 것이고 오지 않을 사람은 와서도 기도하지 않을 것이기에 정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에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 전부터 기도에 대하여 보는데 첫 땅에서 하늘로 향한 호소가 피의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서 아담의 형상대로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둘 다 수확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립니다. 형은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드리고 동생은 목축을 하였기에 양의 첫 새끼를 기름을 구별하여 드린 것입니다. 이때는 제물을 법으로 정하여 놓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나 사람의 조건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일방적인 선택으로 제물을 받아주셨는데 그것이 형 가인이 아니라 동생 아벨의 제물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가인의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왜 안색이 변한 것입니까? 왜 자기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받아주면 둘 다 안 받아주든지 해야지 왜 아무른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서는 각자의 수확물을 얻었기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데 왜 차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분노가 동생을 죽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를 하셨습니다.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여도 이미 죄란 권세이기에 죄를 다스릴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어느 인간도 독자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차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제물을 받아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인간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차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어느 인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들은 자기 행위를 기준으로 선악을 판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은 경쟁의 줄 세우기로 가득합니다. 세상이든 교회든 다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런 극단적인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23:33-36절입니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이 땅이 심판받는 이유입니다. 뱀들과 독사의 새끼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에 열심히 나가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며 열심히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의 조상들에 의하여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흘린 것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의 피를 흘린 정점인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읍이라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이미 창세기 4장부터 땅에서 피의 소리가 하늘로 호소하고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분노하는 땅입니다. 왜 자기의 공로를 인정해주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로만 구원하시는지 거기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의롭다고 경건하다고 깨끗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는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어울리는 예수님이 영 못 마땅한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런 예수님이 죽도록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증거 하는 제자들마저 죽여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학교를 보십시오! 온통 성적으로 학교 줄 세우기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회사를 갑니다. 온통 실적으로 줄 세우기를 당합니다. 이들이 어른이 됩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가정이 어떤 가정입니까? 이들이 다니는 직장은 당연히 경쟁과 줄서기입니다. 그러니 교회마저 세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습니다. 은혜가 설 곳이 없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발전을 말합니다. 무한한 경쟁을 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적이며 정욕 적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바로 짐승의 표를 받은 세상이며 우상에게 경배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본문 1-2절을 봅니다.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아버립니다. 땅이라는 것은 단지 육지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나옵니다만 바다와 강과 하늘까지 다 포함됩니다. 즉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영역전체에 임하는 재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아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쏟아버리니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납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중 여섯 번째 나온 재앙이 독종입니다. 이런 재앙은 경고가 아니라 징벌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은 전체적이지 않습니다만 이제 나팔 대접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3절입니다. 두 번째 대접을 바다에 쏟으니 바다가 피가 되어 바다의 생물이 다 죽습니다. 사람들이 땅의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것으로도 삽니다. 소금과 해산물과 무역의 이루어지는 바다가 재앙을 받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셋째 대접을 강과 그 물 근원에 쏟아버립니다. 애굽의 재앙 중에 강물이 피가 된 사건이 있습니다. 애굽은 강을 의지하고 사는데 강이 피가 되어버리니 그것이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5절입니다.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다고 합니다. 그 심판이 의로우신 것은 6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에 그들이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하고 의롭다는 것은 의로운 피가 이 땅에 흘린 것입니다. 참으로 의로우신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피가 흘린 땅입니다.

그런데 그 피를 흘린 자가 우리는 아닙니까? 우리가 언제 나의 이익보다 예수님을 먼저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나의 자존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한 적이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 그가 창조하였고 그를 위하여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내가 먼저였습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나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져도 심판이 합당하고 의로우시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자들이 믿음이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고백이 자신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죄인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불의하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니 이상한 신비체험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롭고 합당하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 중에 예수님이 대신 심판받으심으로 심판을 이기고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