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출애굽기 21:1-6 귀를 뚫은 종 2010. 9. 19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3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한국사회에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남자의 예로 들면 직장을 가지고 가정이 있으며 사회통념상 건전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전도하는 사람이 당신은 지금 종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 진리가 당신을 자유하게 한다고 전하면 전도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종이 된 적이 없고 나도 종이 아닌데 왜 종이라고 하면서 자유 하라고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마치 도를 전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피하듯이 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에 이렇게 전도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대로 할례도 행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 왜 우리가 종이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34-36절에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이미 그들이 죄의 종이 되어 있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신이 오히려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멀쩡한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마귀의 종이라고 하면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종이 된 적이 없다는 그들에게 죄의 종이라고 하시면서 아들이 자유롭게 하여야만 자유를 얻는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독단적인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아들이 자유를 주시는 것을 보이시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종이 되게 하시고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나라에서 4대에 걸쳐 나그네가 되었다가 돌아와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까? 왜 그대로 가나안에서 살게 하시지 않고 이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종에서 자유를 얻어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또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내려가 430년 동안 살아야 하고 요셉의 사후에는 그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압제를 당합니다. 출애굽 직전에는 더욱 고역이 심하여 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난이 가중되어 부르짖었던 것은 그 고난만 없으면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셔서 애굽에서 출애굽 시켜 버리십니다. 그 과정에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부으시자 애굽 사람들이 10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과 은을 주어가면서 내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고 싶어서 나온 출애굽이 아닙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으로 출애굽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에서 자유를 얻어 나온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목격합니다. 이들이 마지막 재앙 때에 장남이나 짐승의 처음 난 수컷이 살아남은 것은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이 피를 바르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자기들이 잘 나서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 중에 살아남았고 출애굽이 일어나고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자유를 늘 기억해야 하는 장치로 가나안 땅에서 히브리인의 종에 대한 법을 주십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세울 법규가 이러하다고 하면서 첫째로 히브리 종을 사면 육년 동안 주인을 섬기고 칠년 째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 종이 혼자 왔으면 혼자 나가고 결혼한 채로 함께 종이 되었다면 아내와 함께 나갑니다. 그러나 주인이 그 종에게 아내를 주고 또 자녀를 낳았다면 그 여인과 자녀는 주인에게 속하였으니 그 종만 자유롭게 나가도록 하게 합니다. 이방인의 종에 대하여는 다른 규례가 있습니다만 히브리 종 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15:12-18절을 봅니다. “봉독” 출애굽기보다 좀 더 상세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내산 언약이 약 40년 후에 모압에서 갱신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고 있습니다. 일곱째 해에 종에게 자유를 주는 이유는 15절입니다.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속량 하셨음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히브리인이 종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빚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빚들이 많아지고 갚을 수가 없으면 그 빚 대신에 자기 몸을 빚 대신에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빚을 졌더라도 7년째에는 자유를 주고 오히려 그에게 후하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제대로 지켰을까요? 지키지 않았습니다.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그들이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여 종으로 팔렸는데 그들에게 칠년 째에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세계는 종이 많아야 부자입니다. 노동력이 노예에게서 나오기에 돈을 주고 노예를 많이 사 들이고 또 노예로 하여금 자녀를 생산하도록 여종을 남종에게 주어 그 자녀들까지 노예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칠년이 되면 그 종이 빚을 다 갚지 못하여도 자유를 주어야 하고 종에게 후하게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다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범죄 한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어 평생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안식과 해방이 주어질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을 모형으로 보여주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에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 결과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합니다. 그 멸망하기 직전의 모습을 예레미야에서 봅니다.

 

예레미야 34:8-22절입니다. “봉독”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하기 직전에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하나님 앞에 계약을 맺습니다. 그 계약은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면서 체결하는 것입니다. 계약을 어기면 그 짐승처럼 쪼개져 죽는다는 맹세의 계약입니다. 그 계약은 히브리 남녀 노비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종을 풀어주고서는 그 뜻이 변하여 풀어주었던 종을 다시 잡아와서 종을 삼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살아보려고 종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애굽 군대가 도와주러 온다고 하고 바벨론이 잠시 물러가니 그 사이에 벌써 마음이 변하여 자유를 준 종을 다시 잡아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숨 돌릴 틈만 나도 딴 생각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어 종이 육년을 섬겼으면 칠년 째에 자유를 주라고 하였는데 너희의 선조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내 앞에서 계약을 체결하고도 배신하였으니 너희가 나의 이름을 모독하였다고 하시면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자유를 주시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를 주시면 어떻게 됩니까?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유를 좋아합니다. 독재 정권에서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하여 투쟁합니다. 경제적인 노예상태면 경제적이 독립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IMF때 금을 모아 판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원하는 자유는 신에게서 자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소리칩니다. 더 이상 신에게 매여 살지 말라고 철학자도 말하고 과학자도 말합니다. 목사도 신부도 믿지 않습니다. 그게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지 신에게서만 자유 한다면 얼마든지 여러분은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리처드 도킨슨 같은 사람은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신이 되리라는 유혹의 결과들입니다. 온 세상이 자유를 외칩니다.

 

그런데 참된 자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5-6절을 봅니다. 종으로 팔렸다가 칠년 때에 자유를 얻어 나갈 수 있는 종이 상전과 처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상전인 주인이 종에게 선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도 주고 자식도 낳았습니다. 이제 칠년이 되어 자유를 얻어 나가야 합니다. 아내와 자식은 종이라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주인을 사랑하고 아내와 자식도 사랑하여서 자유인이 되기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하면 주인은 그 사람을 데리고 재판장에게 갑니다. 재판장이 하나님으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문이나 문설주에 세우고서는 귀를 뚫어버립니다. 이것은 평생 주인의 노예로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이 종이 노예입니까? 자유입니까? 사랑의 종은 종이 아니라 자유며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자유를 종들에게 준적도 없고, 또 자발적으로 주인을 사랑하여 스스로 귀를 뚫어서 종신토록 종이 되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시나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귀를 뚫은 정도가 아니라 손과 발이 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에 찔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스스로 종의 자리로 걸어간 것입니까?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슨 종이었습니까? 죄와 사망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마귀의 종 된 특징은 자신은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자유인이라고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우깁니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나 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계속하여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고 싶고 신이 있다면 신도 부리고 싶은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유혹의 결과입니다. 그 결국은 사망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죄와 사망에 매여 있는 자들을 주님은 스스로 종의 자리에 오셔서 그들을 해방시키십니다.

 

누가복음 4:18-21절입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잃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고 결국 죽였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어떻게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5:20-29절을 봅니다. “봉독”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제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샀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로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고전6:19-20, 갈5:13).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된 자리에 가셨듯이 주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자는 스스로 귀를 뚫는 종의 자리로 가게 만드십니다. 이 종의 자리가 자유이며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