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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7-12 십자가의 걸림돌 2012. 1. 22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아주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공로로 인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보태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할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그 언약을 주시면서 영원한 언약의 표라고 하셨고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세기 17:9-14).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언약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 흡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나무에 달려 죽은 죽음은 저주의 죽음인데 어떻게 그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언약의 백성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자랑들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런 것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합니다.

 

설 명절에 덕담을 나눕니다. 무엇이 덕스러운 이야기라고 합니까? 건강, 부, 화목, 취업, 결혼, 입학, 승진 등을 덕담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의 덕담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주어진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어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채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이 목숨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인데 정말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어떤 사람이 환난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 환난조차 복이라고 하는 덕담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7-8절을 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복음을 순종하며 잘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그 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드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모든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 만’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기들의 가치와 교리와 주의와 주장을 받아들여야 온전한 구원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면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합니다. 처음에서는 미미해 보이지만 나중에 그 성질을 변하게 하는 것이 누룩의 특징입니다. 성경에서 누룩을 두 가지로 비유합니다. 하나는 천국을 설명할 때에 누룩으로 비유합니다. 그 외에 누룩은 잘못된 교훈과 교리를 누룩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제자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떡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떡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이란 결국 사람들의 자기 가치 챙기기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모르기에 자기 의를 세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0절입니다. 아주 무섭게 책망을 하면서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 바울의 확신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빼 버리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열심만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지를 주고받으며 복음을 확증하고 그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읽혀지는 것이 바로 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는 그런 다른 복음을 들고 오는 자들이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복음 안에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하면서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였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겠느냐고 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 마다 가장 반대하며 죽이려고 한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습니다만 할례란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의 언약이며 이 언약은 영원하다고 하셨고 이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바울이 이 할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행하여야 한다고 한마디만 하였다면 이런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박해를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걸림돌’ 오늘 이 땅에 전도하는 내용들이 과연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과 행복으로 초대한다고 합니다. 전도지를 보면 온갖 행복과 복과 건강을 미끼처럼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 전도지를 보고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며 오겠습니까? 자신의 소원을 교회가면 이루어주겠다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로 왔더니 예수님께서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혼이 잘되고 건강하며 범사에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가지를 잘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금요일 새 언약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십자가란 예수님 홀로 지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자기 백성위에서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볼 때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과 행복에로의 길이 아니라 죽음에로의 길이며 나그네와 외국인과 같은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왜 믿음의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나온바 고향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자기 백성이라 하시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본향을 준비하셨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의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까? 바울사도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 많은 핍박과 환난을 피하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려면 아주 간단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인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부적처럼 여기게 만들면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묶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불교가 훨씬 잘합니다. 이 말씀은 이제 내가 너를 죽은 자로 다루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과 나의 뜻과 나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갈망이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합니다. 기도를 하나 하지 않거나 간에 언제나 내가 중심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간에 언제나 내가 중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상을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기에 아들을 중심으로 통일시키십니다(골1:16, 엡1:10).

 

그러므로 십자가란 모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심지어 성령의 지시로 예수님을 증거 한 세례요한조차 예수님을 보고서 실족할 만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면 유대나라를 괴롭히는 모든 세력들을 추방하고 다윗과 같은 왕이 다스리는 그런 날을 소망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이 회복이 되고 온 세상의 보물이 그곳으로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증거 하였기에 이제 겁 없이 세상의 권력인 헤롯왕의 불륜을 공격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이 원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묻습니다.

 

마태복음 11:2-6절입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일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맹인, 나병환자, 소경, 죽은 자로 등장하는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바로 메시아의 일이라고 하시면서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면 반드시 십자가의 걸림돌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을 원합니다. 내 인생의 디딤돌이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다 끌어 모읍니다. 인맥, 혈연, 지연, 학연들을 다 끌어 모아서 자기의 디딤돌로 삼아 자신이 올라서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디딤돌로 삼고 싶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듣습니다. 십자가도 듣습니다. 복음도 듣습니다. 그것도 나의 도움이 된다면 나의 디딤돌로 삼으려고 챙겨봅니다. 교회도 나가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나에게 도움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버려야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 채워졌기에 더 이상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춥고 배고파서 예수라도 도움이 되는 줄 알고 찾았는데 이제는 춥고 배고프지 않습니다. 먹고 살만하기에 이제는 다른 것으로 충족하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십자가의 복음은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이런 상황을 눈치 빠른 종교인들은 압니다. 그래서 온갖 대안을 만들어 무너지는 교회를 부흥시키자고 합니다. 이 역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봉독”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는 정말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걸림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는 십자가의 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는 자들도 사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 져야 합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원한 메시아, 내가 원한 복음, 내가 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져 내리는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이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많이 본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도 끊임없이 표적과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수많은 표적과 기적을 보고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란 철학을 말합니다. 철학이란 논리적입니다. 인과율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논리체계에 갇힌 자들이 헬라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의 대신 저주 받으심과 자기 백성에게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란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다 거리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걸림돌을 그대로 전하는데도 그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